아기똥 아기똥 걸음마 하다
응가 한 자리에
애기똥풀 꽃송이들.
노루목으로 잘못 들어
찔끔 쉬한 구석에
노루오줌 몇 포기.
밤이면 번질나게
쥐들이 오가던 길목에
쥐똥나무 한 그루.
강아지 똥을 헤집고 뻗은 덩굴에
조막손 같이 열린
개똥참외 두어 개.
발 나비도 얼씬 않는
내 인생 뒤란에
살금살금 들어와,
발름거리는 코를
꼬옥 거머쥐고,
깔깔거리는 손주들.
*‘그림자의 발자국(2)’에 게재
어렸을 적에는 뒤란 모퉁이에서 잘 놀았다.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이 곳이야말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우리들만의 무대(舞臺)였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아들 딸 인형(人形)들을 시집 장가 보내는 아빠 엄마까지 되어 보았다. 우리들 끼리 미리 성인식(成人式) 예행연습(豫行演習)을 한 셈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결혼(結婚)하며 가정(家庭)을 이루며 산다는 것이, 소꿉놀이일 것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 살이를 마감하려면서, 후손(後孫)들에게 ‘이것이 인생이다’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온통 씁쓰레한 맛, 구리고 지린 냄새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그렇다고 가리고 감추며, 떼놓거나 덧붙이면 아니 보여준 것만 못하지. 삐뚤어지고 기울어졌어도 그게 진실(眞實)인 것을.
우리 어렸을 적에 그랬듯이, 손주들이 뒤안 뜰로 놀러 와서 여기저기 널려있는 오물(汚物)을 밟고, 지독한 냄새에 코를 쥐며 달아난다면 어떻게하랴. 애기똥풀 ․ 노루오줌 ․ 개똥차외...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워졌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마 똥 ․ 오줌과는 직접 관련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뒤안 뜰에 이런 앙증맞은 이름을 가진 식물(植物)만이 자라고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아이들이 놀러 와서 이런 이름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쥐며 달아날 것은 뻔한 일이다. 물론 요즘은 옛날의 그 뒤안 모퉁이와 같은 집은 시골에도 보기 드문 세상이 되었지만.
아들 딸들이 나이 들어 아버지의 회고록을 읽으면, 애기똥풀 ․ 노루오줌 ․ 개똥참외를 본 것 같을 것이다. 손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