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획은 충분히 감정적이어도 괜찮다

기획자이자 사람으로서의 기록

by 심지헌

기획을 시작할 때, 나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말은 이것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감정을 빼고 판단해.”
그래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실수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감정을 지웠다.

사람보다 숫자를 먼저 봤고, 감각보다 구조를 먼저 설계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아. 나는 전문가니까.”


그런데 기획은 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토록 객관적으로 정리한 보고서가 현장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심혈을 기울인 제안이 고객의 표정 하나에 무너졌다.

그때 처음 알았다.
‘기획은 이성과 논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감정 없이는, 결국 닿지 않는다.’


기획은 사람을 위한 일이다.
공간을 기획한다면, 그 안을 채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어야 하고,
브랜드를 설계한다면, 그것을 마주할 사람의 맥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서비스를 디자인한다면, 고객의 피로와 바람, 불안과 기대를 함께 경험해야 한다.
그래서 진짜 기획자는 언제나 감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감정으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획에서 ‘감정’을 배제하라고 배운다.
논리적 사고, 시장 분석, 정량 데이터가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
기획서에서 감정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기획자의 감정 표현은 비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기획자들은 조용히 감정을 숨기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불안하다는 걸 알면 신뢰를 잃을지도 몰라."
"이 공간에 마음을 다 쏟았다고 말하면 감정 과잉이라 할지도 몰라."
"고객에게 감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고 보고하면 ‘주관적’이라는 말이 돌아올 거야."

그렇게 우리는 점점 감정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멀어질수록 기획은 더 공허해지고,
사람의 마음과는 점점 더 먼 곳에 위치하게 된다.


나는 다시 나의 감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 설레는 마음, 초조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
그 마음들이야말로 내가 진짜 ‘왜’ 이 일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였고,
기획서의 문장보다, 브랜드의 슬로건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향하고 있었다.


감정이 있어야 설득이 일어나고,
감정이 있어야 기억에 남고,
감정이 있어야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감정적인 기획자가 되기로 했다.

좋은 기획은 결국, 사람을 향한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기획은,
누군가에게 ‘이건 나를 위한 것이구나’라는 감정의 경험을 남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획은 충분히 감정적이어도 괜찮다.
기획자이자 사람으로서,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기획을 더 진심 있게, 더 살아 있게, 더 사람답게 만든다.


그 감정 하나하나가, 기록될 가치가 있다.
당신의 기획은, 당신의 감정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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