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일제강점기 초기,
역사학자 신채호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고려 시대, 비록 김부식에 의해 실패했지만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묘청의 '난'으로 명명되었으나
그의 무모함이 현명함으로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재평가되는 시점이다.
난 학창시절에도, 어른이 되어서도
역사라는 과목에 큰 관심이 없었다.
역사는 반복되며,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실감하지 못한 것이다.
역사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선례, 인간의 삶에 대한 빅데이터라고 생각하면 될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 라는 개인의 인생 역사도 촘촘해지며
'국가'의 역사가 지니는 힘과 의미도 조금은 더 알 것 같았다.
분명 과거는 더 이상 바뀌지 않고, 힘이 없다.
하지만 과거가 흐른 이후
어떤 가치와 의미를 더할 것인가에 따라
과거에는 힘이 실린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과거, 역사의 의미는
곧 '인간'의 역사이기에 정답은 없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과거가 쌓여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음에 그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함을,
과거와 현재는 분명 다른 사회적 맥락과 기술력 그리고 인간을 공유하기에
과거로부터 꼭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때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역사가 존재함을 이야기했다.
과거의 지혜는 배움으로 얻을 수 있는 자긍심을, 과오은 잘못으로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을 담을 수 있을 때 역사의 의미가 피어날 수 있음을 생각했다.
개인의 인생에 닥쳐온 퇴보에 대응할 수 있는 힘도 때론 관용을 베푸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꽤 늦게 깨달았다.
인생의 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움 속에서 크고 넓은 관점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다니며 여러 학문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한 학문에 깊게 파고들며 넓고 깊은 세계를 알아가나 보다. 더해 여러 사회 경험을 하고, 직접 부딪히며 깨닫는 앎 속에서 삶을 배우고, 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
비록
나는 곧 '나'이기에 시선이 좁아지기도,
'지금'을 살아가기에 지금이라는 한계가
넓은 시야을 갖추지 못해 한 발짝 더 나아가거나 한 발짝 떨어지지 못하는 순간이 있어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법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포용력을 되새기는 현재의 나를 낳기도 한다.
그럼 점에서 역사는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관점을 갖게 해준다.
어렸을 적,
좋은 소식이 생기면 전화를 드리곤 했던 할아버지께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저
뭐든 잘해내는, 자랑스러운 장손녀가 되기 위해
일희일비에 담긴 의미도 제대로 모른채
80여년의 인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조언을 귀로만 흘려 들었던 것 같다.
어느새
오직 성취에 맡겨진 나의 정체성과 감정선은 삶을 불안하게 했고,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하는 자신감은 힘이 부족했다. 외부의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 주는 안정이, 자존감이 절실한 순간들이 곧 찾아왔다.
그렇게 찬찬히, 느리게 바라본 나의 과거는 역사의 의미를 더하며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지다가도 현재의 내가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과거의 내 아픔과 깨달음이 흘린 의미들은
미래의 내가 또다시 고전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의 고전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기억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또 다시 새긴다.
기록하자.
어쩌면 나는 나의 역사를 쓰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