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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Jun 24. 2024

뜨거운 뜀박질

영화 에세이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 선희의 전 남자친구 문수는 오랜만에 만난 선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내 인생의 화두야”


화두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화두는 말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하든 항상 시작에 오는 대상은 우리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아마도 문수에게 선희는 삶의 주제가 되었나 봅니다.


우리의 삶에서 ‘화두’가 될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 권태? 명예?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꿈을 잘 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꾸는 꿈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저의 이러한 불능 상태가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면, 한 번 꾼 꿈들은 정말 오랜만에 꾸는 것들이라 까먹질 않거든요. 그런 제가 아주 긴 간격으로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층계의 중간쯤 서있습니다. 제 눈 앞에는 한 남자가 목에 칼을 찔린 채로 쓰러져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저지른 일 같습니다. 제 손에 칼이 들려있고 핏자국이 군데 군데 보이네요. 제 몸은 완전히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이 이리 저리 한정된 시야를 더듬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 벽은 어두운 갈색 목재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제가 알던 공간이 아닙니다. 그렇게 저는 온몸이 돌덩이가 누르던 것처럼 무겁다가 이내 용수철이 튀어 나가듯이 전속력으로 문을 열고 뛰쳐나옵니다. 집에서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돌고 한번 더 왼쪽으로 돌아 골목길로 들어옵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손을 보니 아직도 손에 칼이 들려있네요. 근데 이상하게 칼을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손바닥에 칼이 접착된 것처럼 말이에요. 누군가 칼든 제 모습을 보면 안 되니 좌우를 계속해서 살핍니다. 누군가 제 쪽을 향해서 걸어옵니다.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저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은 직감에 목뒤로부터 빳빳한 긴장이 치솟습니다. 남자가 저를 설득하네요. 대화의 내용을 보니 저와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용수철을 잘못 튕기면 하늘이 아니라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데, 그런 것처럼 그 남자도 찌르고 말았습니다. 왜 찔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골목길을 뛰쳐나온 저는 전력으로 어딘지 모르는 길을 가로지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종종 꾸는 꿈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꾸는 이 꿈을 꾸고 나면 이불은 온통 젖어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상한 사실은 다시 잠에 들면 꿈의 내용이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몇 시간에 달하는 체검 사긴 동안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홍상수식으로 말한다면 제 화두는 도망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죄를 지었다는 느낌일까요?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누가 볼까 걱정하며 도망갔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죄책감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수치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 스스로가 부끄럽고 부적절하다는 의미의 수치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내가 타인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타인이 나를 보고 있다는 시선의 위계를 알아차리면 수치심이 뒤따른다고 하는데, 이런 느낌의 수치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들통날 것 같은 느낌. 대체 뭐가 들통날까 두려운 걸까요? 어쨌든 저는 도망치며 달립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시리즈 중에서 도망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잭 홀스맨>이라는 TV 시리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동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요. 주인공 보잭 홀스맨은 말 그대로 중년의 배불뚝이 말(horse)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도망치고, 진정한 관계를 맺는 데서 도망치고, 남을 사랑할 것 같은 상황에서 도망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모습이 밉지 않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기점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모두 걷고 있든 달리고 있든 시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죽음은 일종의 완성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벽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이유는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도망치는 것들이 밉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왜냐면, 끝까지 도망쳐본 것들만이 다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정쩡하게 도망치면, 언제든지 다시 도망치고 싶어지잖아요. 끝까지, 끝까지 도망치고 나서, 더 이상 도망갈 공간, 내가 숨을 공간이 없어지면 이제 돌아갈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여기가 끝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나열하다 보니 <애드 아스트라>라는 제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우주비행사 로이는 공허한 인물입니다. 명왕성 다음의 행성을 찾으러 떠난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그는 아버지를 찾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물론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구요. 자기 주변에 있는 아내와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권태로움인지 무상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냉담한 일상을 보내던 로이는 아버지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 임무를 맡게 되고 지구에서 명왕성을 향해 날아갑니다. 영화는 이 여정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아주 지루한 슬로우 비디오처럼 기술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도망칠 때는 전력으로 뛴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거북이 걸음이나 마찬가지인 거죠. 아,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답니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쏭달쏭한 결과물을 들고 지구에 도착한 로이는 지구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가족을 만나려는 마음을 먹습니다.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한 이동. 이건 마치 진자운동 같네요. 진자 운동에서 진자가 멈추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야 합니다. 영화 친구분 중에 한 분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너무 웃기다고 하시더라구요. 맞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보면 너무나 우스운 것이지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저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걸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이 꿈을 잘 꾸지 않습니다. 최근 2년 동안에는 꾸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다는 건 제가 이제는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들통날 것이 없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행복에 도달했기 때문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이후에라도 그 꿈을 꾼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저는 다시 한 번 온몸으로 뛰어보겠습니다. 인류가 두 다리로 도망치면서 진화했다는 말이 있듯이, 뜨거운 뜀박질은 결국 나를 향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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