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학교 인사말이 ‘사랑합니다’인 거는 너무 구리지 않아요? 솔직히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말만 사랑한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 말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관해선 나이가 어릴수록 잘 안다. 이 녀석들은 사랑을 동물적으로 감각하곤 하니까.
사실 저 말은 참 우스운 말이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만약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게 남발되어야 하는 단어라면, 나는 사랑을 말하지 않겠다, 하며 심술궂은 마음을 속으로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또 어찌나 사랑을 유기하는 말인가.
어느 날 너는, 사랑해, 하며 내게 말했고, 내가 사랑의 글자를 매만질 때, 성난 소리가 불꽃이 되어 귓가를 태웠다. 사랑한다 하는데 왜 사랑을 말하지 않느냐. 사랑하면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지 않느냐. 그 말에 나는 말없이 추락하는 난파선이 되어, 점점 쏘아오는 너의 말에 쫓겨, 강가에 몸을 던지듯 사랑한다는 말을 토해냈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데,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데.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쉬이 쓰이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이리도 빨리 말해져도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내가 너의 사랑에 적시에 응답하지 못했던 이유는 사랑이라는 어휘를 대신하여, 다른 형식으로 사랑을 발화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지연시키며, 너를 고역케 했다는 걸.
그렇게 네가 가고, 내게 남은 것은 사랑을 바르고 적절히 호명하고자 하는 마음. 이 소중한 마음을 품고, 작년부터 사랑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내가 너를 모네 원화전에 처음 데려갔을 때, 수련 앞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붉어진 눈시울을 띄며 천천히 양손을 모아 가슴 위에 살짝 포개던 너의 모습을, 하찮은 나의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으니까.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그런 너에게 느꼈던 나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저 이해하고 싶었다.
약속을 줄이고, 미학, 철학, 문학, 영화 서적을 읽으며, 시와 영화에 빠져 산 지 1년이 흘렀다. 이제는 네가 수련 앞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네가 없는 자리에 사랑의 해상도만이 부끄러이 남아 선명함을 밝힌다.
그리고 이해가지 않던 시와 영화가 또렷이 느껴졌다. 영화는 살결이 되고 시는 노래가 된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너라는 문제를 규명하려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내가 사랑하는 시와 영화를 해명하고 있었다. 결국, 네가 내가 남겼던 건, 지나간 너를 해명케 하는 갈망이 아니었구나. 사랑이 진실로 사람에게 남기는 것은, 다가올 사랑을 더 상세히 헤아리게 하는 마음이구나. 그렇게 네가 내게 남긴 파문이 1년 뒤 시가 되어, 나에게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