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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Aug 04. 2024

함께 꾸는 꿈

“우리 집에서 만화 볼래?”


같은 반 여자아이 S가 갑작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먼저 추측해보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초등학교 4학년의 생각은 너무나 명료했다.


“응!”


그렇게 S의 집에가서 우리는 진짜 말 그대로 만화를 봤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바로 오른편에 있는 S의 방에서 우리는 카드캡터 체리 일어 버전을 봤다. 그리고 거기서 끝. 몇 시간 동안 잘 놀고 나는 집에 갔고, 일상이나 관계에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작은 변화 하나라면 내가 S를 평소보다 자주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 중학교 배정 결과가 나왔을 때, 운동장 구령대 밑에서 S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어정쩡한 거리에서 나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S는 왜 나에게 만화를 보자고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보여준 게 카드캡터 체리였을까? 왜 더빙본이 아닌, 자막도 없는 일어 버전을 보자고 했을까? 지금 돌이켜봐도 정확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일어 버전의 카드캡터 체리가 S에게 아주 소중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S는 카드캡터 체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고, 영상을 재생할 때는 숨겨둔 보물을 은밀하게 살짝 꺼내어 보여주듯 심혈을 기울여 조심조심 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자 아이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도 S가 나에게 아주 소중한 걸 보여주려고 한다는 걸, 그걸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불교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위아래, 이 세계에서 유아, 즉 나만이 홀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각 개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일 수 없다. 너는 나일 수 없다. 아담과 이브가 반으로 쪼개졌듯, 우리는 끝이 무뎌진 퍼즐 마냥 맞물리지 않는 조각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조건 짓는 현실이 동상각몽이라 할지라도, 같은 걸 보려 한다면 적어도 유사한 꿈을 꿀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니 소중한 것을 보여주려는 마음은 아마도 함께 꿈을 꾸자는 다정한 권유일 수도 있겠다.


최근에 정동진 독립영화제를 다녀왔다. 정동진 영화제는 일반적인 영화제들과 상영 방식이 다소 다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정동초등학교 운동장 바닥에 앉아서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야외 상영되는 작품들을 관람해야 한다. 개방된 공간에서 수천명의 관객들이 같은 영화를 보고 듣는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라는 정동진 영화제의 구호가 함께 꾸는 꿈이라는 소원을 담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하고 이제 1년 남짓 시간이 흘렀다. 서울독립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를 다니며 느꼈던 슬픔 하나는, 본다는 과정이 어떤 점에서는 지독히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감독, 배우,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를 이리 저리 바꿔가며 테이크, 테이크, 테이크.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영화제에서 보는 경험은 영화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영화제에서 한번 상영되고 창고로 들어갈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잠시 후 사망할 어떤 이를 만나는 순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잉태되었으나 탄생하지는 못하는 영화라는 이미지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조차 가질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애처로움. 그것이 내가 올해 영화제에서 느꼈던 감정의 마침표다.


정동진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상영된 영화 중 어떤 영화는 개봉할 것이고, 어떤 영화는 창고로 가거나 삭제되어 데이터로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말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지만, 수천명의 관객들이 학교 운동장을 나와 밤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물리적 이미지는 사멸하지만, 우리들이 영화라는 꿈을 함께 꾸는 동안 그 위에 새로운 말과 글이 쌓여간다. 어떤 점에서는 이 또한 영화의 탄생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국, 주체는 타자에 의해 탄생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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