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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Sep 09. 2024

순간을 향하는 영화의 사랑법

<비포 시리즈>와 <애프터썬>

요즘은 재개봉 세상이다. 영화 산업이 장사가 잘 되지 않으니, 어정쩡한 영화들을 배급하기 보다는 잘 나갔던 명작들을 다시 재개봉하는 전략이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한데, 나처럼 영화에 늦게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런 유행이 감사할 따름.​


어쨌든 이런 흐름에서 재개봉하는 영화들 중에는 사랑 영화들이 많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포 미드나잇>이나, <비포 선셋> 같은 영화들. 그리고 <애프터썬>. 애초에 인간이 만들어 낸 대부분 이야기의 근간이 사랑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이 사랑을 다루는 방법. 다시 말해, 각 영화들만의 사랑법은 한번 곰곰이 짚고 갈 여지가 있다.​


먼저, 비포 시리즈를 살펴 보자. 비포 시리즈 중 선호하는 순서를 뽑으라면 나는 보통 <미드나잇>, <선셋>, <선라이즈>를 꼽는다. 시리즈의 전체적인 마력을 <선라이즈>에서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선라이즈>가 있기에 <선셋>과 <미드나잇>의 감동이 따라오는 것이긴 하지만. ​


비포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 내부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시간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선라이즈>에서 만나고 <비포 선셋>에서 10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10살만큼 나이를 먹었고, 우리 또한 그만큼 기다린 후에 그들을 만난다. <미드나잇>도 마찬가지다. <선라이즈>이후 10년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선셋>에서 재회에 성공하고, <미드나잇>에서는 만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지지고 볶고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간다. 마치 사랑의 생애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인물들의, 우리의 시간이 어떤 인위적 변동 없이 시리즈와 함께 흐른다. 영화가 시간을 편집하는 그 자신의 특권을 사용치 않고, 그저 묵묵히 우리와 함께 흘러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온유한 물살이 되어 가슴 언저리를 시큰하게 쓸고 간다.​


다음으로 애프터 썬을 보자.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화면의 질감이 전체적으로 흐릿하다는 것, 카메라의 이동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좁고 닫혀 있는 클로즈업 같은 프레임을 자주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기억과 아주 유사한 속성이 있다. 기억의 이미지는 선명하기보다는 뿌옇고 두서없으며, 동영상보다는 고정된 사진적 이미지의 형태로 드러나고, 전체적 장면보다는 아주 부분적인 것에 초점에 맞춰져 있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상영되는 1시간 30분 가량의 영상 이미지는 대부분 기억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 그 기억의 이미지가 다소 중구난방이라는 점이다. 이성에 대한 성애적 관심, 아버지에 대한 애정 욕구, 신체 접촉으로 발생하는 감각적 흥분, 주도성을 발휘하여 남을 돌보려는 마음들이 물살 마냥 넘실넘실 흐른다. 이런 비일관적인 이미지들은 하나의 일관된 시점을 형성하기보다는 아버지와의 여행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여러 시점의 꼴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중반부가 넘어가면 이미지들 간 충돌이 발생한다. 소피의 기억들 사이에 아버지가 클럽에서 울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갑자기 삽입되는데, 어릴 적 소피의 기억과는 그 질감과 정조가 너무 다르다. 그리고 이때가 되어서야 그동안 왜 이미지들이 중구난방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영화에서 제시되었던 애매한 시점들은 아버지와의 여행을 기억하는 소피의 여러 나이대의 시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소피가 떠올렸던 기억의 층위에 이질적인 성인 소피의 기억이 침범하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명확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영화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고. 다 큰 소피는 이제 어린 소피와는 다르게 아버지의 고통을, 그 고통을 어수룩하게 숨기려 했던 행동들을, 알아챌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을 향하는 동안 어린 소피의 기억과 어른 소피의 기억들이 층층이 섞여간다. ​


생각해 보면 그렇다. 기억이란 건 단 하나의 에피소드 혹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건을 12살 때 기억하기도 하고, 15살, 19살, 25살, 30살이 되어서 기억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 기억을 떠올렸던 만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하나의 이야기가 쓰여졌는데 뭣하러 과거를 돌이키느냐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계속 돌이키다 보면 어른 소피가 아버지의 고통을 발견한 것처럼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돌이켜야 한다. 그곳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어떤 것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그렇다면 두 영화의 사랑법은 어떻게 다른가? 비포 시리즈가 현실의 시간을 조작하지 않고, 관객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순행적' 사랑을 추구한다면, <애프터썬>은 이미 지나간 당신을 반복적으로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시 쓰는 '역행적' 사랑을 호명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비포 시리즈>가 세계의 시간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사랑'이라면, <애프터 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향한다는 점에서 '회고적 사랑'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은 사랑법일까.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사랑법에 정답에 있을까. 만약에 나라면 이 두 애정하는 영화의 방식을 모두 차용하겠다. 시간의 흐름은 흐름대로 맞이하되, 중요했던 순간들을 계속해서 돌이키고 다시 쓰는 사랑.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런 사랑법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시간 여행자의 사랑법' 정도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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