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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Oct 10. 2024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아파하지 않기

진은영, 최승자, 그리고 한강의 시학

나에게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느냐 물어보면 세 명을 이야기하곤 한다. 한강, 진은영, 최승자. 최승자의 시가 슬픔으로 무너져 내리는 시학이라면, 진은영의 시는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것들을 끊임 없이 사랑하는 멜랑꼴리의 시학이고, 마지막으로 한강의 시는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아파하지 않는 시학일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한강을 제일 좋아한다. 나에게 그는 소설가보다는 시인에 가까운데 그가 고통을 대하는 시적 태도가 내 삶의 모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신형철 작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슬픔을 공부하는 일은 슬픈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점에서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말인가. 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과 세상을 자책하는 이런 말은 자기 연민, 그러니까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운명 앞에서 무너지며 부르짖는 일종의 자기애적인 자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한강 작가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지도 않고, 타인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돌맹이 옆에 가만히 앉아 하루종일 쪼그리고 있는 것. 그게 한강의 마음이고 한강의 시학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윤동주의 <병원>과 같은 시와는 다르게 한강은 타인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의 고통을 느껴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옆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어깨를 기대 그를 살며시 안아준다. 이는 마치 고통에 다가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고통을 대하는 이 극도의 조심스러움. 나는 그 조심성에서 삶을 배웠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보면 때때로 너무 성급히 공감한다. 더 이상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듯이. 공감하는 자는 슬픔을 말한 자보다 더 놀라 공감을 쏟아내고선 자신이 뭔가 좋은 사람이 된 것 마냥 자기기만적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이는 얼마나 이기적인 짓인가. 사실은 내가 타인의 슬픔을 듣는 것이 두려워 타자의 말을 무화시킨 것이면서.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것은 이보다 낫기는 하지만 이도 충분치는 않다. 때로는 어떤 공부도 하지 않고 그저 적막히 함께해야 하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시는 그 공백에서 시작된다. 성급히 타인의 슬픔에 발을 딛지 않고 충분히 같이 주저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신중히 손을 뻗는 것.


거기에는 공감도 없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도 없고, 그냥 당신과 나 뿐이다. 그렇게 적절한 순간에 소중한 이를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혼자서 어눌이 연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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