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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MZ Jul 30. 2022

와인잔의 부캐는 시작됐다

에세이라니 (by 김지연)


“엄마, 우리 이거 살까?”

“그게 뭐야? 와인잔? 사서 뭐 하려고.”

“뭐하긴? 술 마셔야지! 플라스틱 재질이라 깨질 위험도 없고, 좋네! 사자!”


이사하고 나서 동네를 순찰하던 중에, 하나로마트에 들렀다. 신기하게도 다이소가 있길래,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플라스틱 와인잔을 발견했다. 한 세트에 두 개의 잔이 들어있었다. 엄마와 내가 하나씩 쓰면 될 일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깨질 염려가 없는 잔이었기에 더 혹했다. 카트에 넣자마자 바로 주류 코너로 향했다. 그곳엔 각양각색의 술들이 꼿꼿한 자세로 줄 서 있었다.

어느 것을 고를까요? 딩동댕도 아닌데, 열심히 고민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망설임 없이 막걸리를 집어 들었다. 카트에 담는 손길이 너무 재빨라서 나는 엄마를 흘겨보았다. 마시자고 한 건 너야, 라면서 웃어 보인 엄마는 유유히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대로 질 수 없었던 난 얼른 500ml 카스 캔을 들고 뒤쫓아갔다. 그렇게 동의하에 시작된 술타령이었다.


와인잔에 채운 첫 번째 술은 티 없이 뽀얗고, 끝맛이 시큼털털한 막걸리였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한 병을 말끔히 비워낸 뒤에, 입가심용으로 톡톡 튕겨주는 카스를 따랐다.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른 엄마는 이거 하나는 잘 샀다며 나를 추켜세웠고, 난 신나서 이제 우리도 술을 즐겨야 한다고 계몽하기에 이르렀다. 그날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술을 쟁이는 역사를 쓰게 됐다.


사촌 동생으로부터 알게 된 제주 에일, 즐겨 마시는 하이네켄과 기네스, 편의점에서 막 고른 스텔라, 써머스비, 블랑, 호가든, 에델바이스, 파울라너, 칼스버그가 우리 집 냉장고에 칸칸이 채워졌다. 맥주가 질리면 청하, 백세주, 산사춘, 매화주처럼 투명하게 찰랑이는 술들이 그곳을 대신했다.

보다시피, 남들에겐 평범한 술들도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던 말이 딱 맞았다. 흔히 말해, 주량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우리가 이렇게 술을 즐기는 그 자체가 난 너무 좋았다. 이 모든 게 와인잔으로부터 시작된 거라니... 나는 역시 아는 여자였다.


오늘도 입가를 촉촉하게 적셔줄 맥주가 엄청나게 그립지만, 참도록 한다. 왜냐하면 난 글을 써야 하니까, 반드시 써야 하니까, 꼭 써야 하니까. 아아, 와인잔인데 왜 와인은 안 마시냐고 묻는 당신! 아직 그 세계를 잘 몰라서, 와인 오프너는 쥐어본 적도 없어서, 마시려 해도 뭘 알아야 마시지 않냐는 나의 커다란 핑계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한마디를 더한다.

맛있는 와인을 알고 있다면, 혼자 마시지 말고 꼭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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