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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20. 2023

선배님이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어머, 언니~~"

  동대문 원단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녀가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언니? 얘가 날 언제부터 언니라고 불렀지? 얘가 누군지 기억나는 걸 보면 치매는 아닌 것 같은데...



  직장을 다니다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 후 취업이 안돼 백화점을 다니는 등 돌고 돌아 조금 늦은 나이에 패션 디자이너로 취업을 했다. 그곳은 청담동 전재준 부띠끄로 값비싼 부인복을 만드는 회사였다. 디자인실에는 매우 우아한 느낌의 실장(남자)나보다 두 살 나이 어린 선배 디자이너 연진이 있었다.

"저는 '써니 씨'라고 부를 테니, 저를 '선배님'이라고 부르세요."

'님'이라는 말을 유독 강조하는 그녀의 말투에서 나이 많은 후배에 대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막 대학을 졸업한 경란도 나와 함께 입사했다. 추실장은 경란에게는 디자인실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시켰고, 내게는 시장에서 원부자재를 사입하거나, 완성품이 출고되기 전에 옷을 검품하는 일을 시켰다. 그 일은 내가 입사하기 직전에 그만둔 자재담당자가 하던 일이었다.


  딱 감이 왔다. 회사에서 나이 많은 내가 불편하면서도 뽑은 이유는 내가 대학 입학 전 다녔던 회사에서 부자재 관련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명목상 디자이너로 뽑아 자재 관련 일을 시키면 급여를 훨씬 적게 받으면서도 수월하게 일을 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디자인실 수습기간 6개월 동안 월 50만 원 받음)


  사실상 막내 디자이너는 나와 함께 입사한 경란 하나였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디자이너가 됐다고 좋아했는데 나는 날마다 원부자재 시장을 돌고 창고에서 품질라벨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디자인실 소속이니 1년만 버티자, 경력을 만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마음먹었다.


  디자인실과 같은 층에 영업부 있었다. 거기에는  또래의 여직원 두 명, 혜정과 사라가 있었다. 연진은 모두에게 매우 상냥했는데 나한테는 늘 눈을 똥그랗게 뜨고 딱딱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작은 일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녀가 내가 사 온 샘플 원단을 보더니 화를 냈다.

"써니 씨, 내가 사 오라고 한 거 이거 아니잖아."

"아니에요. 선배님이 분명 그거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내가 사 오라고 한 거 아니라고~."

어쩌라고? 잘못 사 왔으면 바꿔 오라고 하면 될 것을 계속 큰소리를 냈다. 나도 덩달아 화가 나서 난 분명 그거 사 오라고 들었다고 맞섰다. 잠시 후에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뭐지?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 나갔다. 혜정과 사라가 연진을 토닥이다가 나를 노려봤다. 하, 저 여우 같은 것.


  그 일이 있은 뒤로 연진과 친한 혜정과 사라, 추실장까지도 나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그나마 경란이 있어 위안이 됐는데, 경란은 막내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되도록 시장에 오래 머물렀다. 광장시장에 가면 자주 가는 단추가게, 원부자재 가게 사장님들이 시켜주는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시장에 맛있는 거 진짜 많다) 수다를 떨다가 회사로 들어갔다.


  내가 시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실장이 너무 늦게 다닌다고 뭐라고 했다. 회사에 있으면 모두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져 불편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1년을 버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10개월째에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친한 단추가게 사장님의 소개로 여기보다 규모가 크고 월급도 많고, 내 또래가 입는 예쁜 옷을 만드는 회사에 면접을 봤다. 내가 하던 일을 경란에게 인수인계하고 3일 만에 퇴사했다. 전재준 선생님한테 '어디 가서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지 말라'는 쓴소리를 들었지만, 난 그저 유쾌 상쾌 통쾌할 뿐이었다.


  새로운 회사에 빠르게 적응했다. 샘플 원부자재를 찾으러 시장에 나갈 일이 많았는데 시장 지리를 알아 빠릿빠릿하게 일처리를 해낸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경란처럼 디자인실 안에만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날마다 야근을 하고 일이 쌓여 있었지만 진짜 디자이너가 됐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몇 달 뒤, 동대문 원단시장에서 실장이 지시한 원단 샘플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머, 언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언니라 부르는 그녀는 연진이었다.

"언니, 나도 전재준 부띠끄 곧 그만둬요. 언니 지금 다니는 회사 어딘지 알아요. 거기 옷 예쁘더라고요. 딱 내 스타일~호호"

'써니 씨, 이거 아니잖아' 하며 떽떽거리던 선배님이 이렇게나 다정한 사람이었나, 깜빡 속을 뻔했다. 우리가 언니, 동생 하며 잘 지낸 사이었는 줄. 연기에 소질이 없는 나는 바쁘다며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회사의 인정을 받고 경력에 비해 빨리 팀장이 됐다. 나보다 경력이 많은 디자이너가 내 밑으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내가 나이가 많으니 경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디자이너 한 명이 말도 없이 그만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어느 날, 실장이 나를 불러 이력서 한 장을 내밀었다.

"써니 팀장, 이번에 이력서 들어온 애 중에 얘 괜찮은 거 같아. 그런데 전재준 부띠끄 자기 다녔던 데 아냐? 얘 알아?"

그녀다. 낯익은 얼굴 사진 옆에 그 이름, 박연진.

"암요. 알고 말고요..."


  - 연진아, 난 정말 너랑 다시 한번 같이 일하면서 너한테 받은 거 돌려 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내 밑에 디자이너 중에 경력을 알면 좀 속상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아쉽지만 실장한테 너 정말 별로라고 사실대로 얘기했어, 미안.


  이십 년이 넘은 일이지만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그렇게 여우같이 사는 애들은 지금쯤 얼마나 잘 살까 진심 궁금하다.



* 재미를 위해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인물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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