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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13. 2023

호텔방에서 둘이 뭘 하자고요?


  밀라노의 어느 호텔이었다. 늦은 , 내 방 전화벨이 울렸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헬로"

"뭐 해?"

다행히 한국말, 이 끈적한 목소리는 함께 온 여행사 대표다.

"술 마셔요."

"심심한데... 뭐... 할거 없을까?"

이 뉘앙스 뭐지?

"이 방에 몇 명 모여있는데 오세요. 같이 마셔요."

"아니, 다 같이 말고... 우리 둘이... 뭐 할거 없을까?"

"네? 우리 둘이... 뭘... 할까요?"

"잘 생각해 보고 생각나는 거 있으면... 내 방으로 와."

욕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뭔가 애매하다. 호텔방에서 남녀가 둘이 할 수 있는 건 내가 떠올린 그것 말고도 공기놀이, 실뜨기, 바둑 등 다양하니까.

"... 그러죠."

전화를 끊고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왜? 누구였어?"

같이 방을 쓰는 동료 물었다.

"야, 크크크크. 여행사 대표가 나더러 자기 방에서 둘이 놀재. 승윤 씨(같이 술 마시던 남자 동료)가 가 봐요. 그 사람 어떤 표정 짓나 좀 보게. 푸하하하 아니, 어쩜 그렇게 성의 없게 여자를 꼬셔."

"많이 외로웠나 보네."


  내가 서른 즈음 디자이너로 일했던 패션 회사에서 유럽으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출장 때마다 이용하는 작은 여행사 대표가 우리와 동행을 했었다. 그와는 몇 번의 가벼운 대화를 나눈 정도의 사이였는데, 나이가 본인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말을 놓고 썰렁한 농담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는 옷과 액세서리를 모두 명품으로 치장한 40대의 이혼남이었다.


  출장은 밀라노에서 3일, 파리에서 3일 정도의 일정이었다. 하루종일 백화점이나 쇼룸을 돌며 시장조사를 했고,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함께 간 인원은 여덟 명이었는데 나는 그중 평소 친했던 동료들 몇 명과 방에 모여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중 두 명이 남자였다. 그들은 성별이 남자일 뿐, 내게는 편한 친구 같은 동료들이었다. 여행사 대표의 전화에 대해서는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든 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 일을 따진다면 그는, '그건 넝~담'이었다고 할만한 인물이었다.


  일행 중에 삼십 대 중반에 성격이 까칠하니 사감선생 같은 느낌의 성팀장이 있었다. 출장 3~4일째 쯤에 그녀가 말했다.

"밤마다 어느 방에선가 깔깔 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아? 그런데 왜 남자랑 여자 목소리가 같이 들리지? 밤늦게까지 한 방에서 뭐 하는 거야?"

우리가 같이 노는 걸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신경질적인 그녀의 말투에 우린 모르는 일인 양 고개를 돌렸고, 그날 밤부터는 조금 조용히 놀았다.


  출장을 다녀오고 몇 달 뒤에 성팀장이 사직서를 냈다. 평소 친하지는 않았지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말을 걸었다.

"그만두신다면서요?"

"응, 몸이 좀 안 좋아서 쉬려고. 운동부족인지 살은 빠지는데 배가 자꾸 나와."

그녀의 배를 보니 마른 몸에 비해 볼록한 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들려온 성팀장의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사감선생 같았던 그녀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놀랄 판인데, 무려 아이를 낳았단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똥배가 아니었다. 왜 묻지도 않은 배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아이 아빠가 다름 아닌... 그 여행사 대표라는 것! 생각해 보니 밀라노에서 그가 내 방에 전화를 했을 때 그는 내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자기 방에서 놀자고 했었다. 그냥 이 방 저 방 전화를 돌린 거였다. 하, 그때 유럽에서 그는 우리들을 물고기봤구나! 그렇게 대낚싯대를 던져놓고 누구 하나 걸려라 걸려라 하고 있었던 거다. 성팀장이 미끼를 문건 밀라노였을까, 파리였을까.


  그들은 애 낳고 잠깐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여행사 대표는 전 부인한테도 아이가 있다던데, 이번 아이도 애엄마가 키운단다. 그는 낚시해서 손맛만 보고 방생하는 자비로운 낚시꾼이었던 건가. 


  오늘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만 하는 짓은 싸구려였던 그 여행사 대표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미안, 저 그때 두 분이 얼마 못 가서 헤어질 거라고 악담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래오래 같이 살라고 축복해줬어야 했어요. 성팀장님이 참 너그러운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그가 이제는 자신이 잡은 물고기에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고 있길 바란다. 낚시를 안 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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