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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29. 2023

바람피운 남자 친구가 고마웠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나는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내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남자들이 다 아빠 같을 거라 믿었고 그 환상은 번번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중 내가 만났던 최악의 남자 조다뻥과의 이야기다.


그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으로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내게 첫눈에 반했다며 계속 연락을 했다. 그 당시(27세)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예쁠 때이긴 했지만 누가 첫눈에 반하고 그럴 정도는 아니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싫지는 않았다.


그는 만날 때마다 선물을 들고 왔고 비싼 음식점에 데려갔다. 집도 좀 사는 것 같고 학력, 외모도 준수했다. 계산기를 두들겨 본 결과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귀기로 했다. 그는 모든 걸 나한테 맞춰줬다. 백마 탄 왕자를 만난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헤어지지고 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서 집이 쫄딱 망했다는 것이었다. 내 팔자에 백마 탄 왕자는 무슨... 속으로는 엄청 실망했지만 난 괜찮으니 헤어질 생각 말라고, 우는 그를 달랬다.


그 뒤부터 그는 뻔뻔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뜬금없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다며 직장을 그만뒀다. 나를 만나러 와서는 저녁을 얻어먹고 택시비를 받아갔다. 버스는 절대 안 탔다. 그동안 나한테  선물을 사느라 쓴 카드 고지서를 나한테 내밀었다.


나는 조금씩 알게 됐다.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나보다 한 살 어리다던 그는 실제로 네 살이나 어렸고 집은 망한 적 없이 원래 가난했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을 다녔다는 것도 다 가짜였다.


그는 거짓을 또 다른 거짓으로 덮으려 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울면서 매달리거나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을 못 만나게 했고 의심했다. 휴대폰을 받지 않으면 집이나 회사로 전화를 걸어 난리를 치거나 집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이런 인간을 만난다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될까 두려웠고 그는 내 두려움을 이용해 더 제멋대로 굴었다.


그는 신용불량자가 고 휴대폰이 정지됐다.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본인 명의로 휴대폰을 개통할 수 없으니 내 명의로 하나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내가 이 놈 휴대폰 요금까지 내줘야 하나 싶었지만 일을 한다고 하니 해 줬다. 그 와중에도 비싼 기종을 요구했던 정신 나간 놈이다. 물론 난 제일 싼 걸로 해줬지만.


어느 제과 회사에 취직한 그는 연락이 뜸해졌다. 는 주중에 가끔 연락을 했주말에는 연락이 없었다. 잘 됐다 생각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어느 날, 그가 쓴 휴대폰 요금을 확인하다가 촉이 왔다. 나와는 거의 통화를 하지 않는 그의 휴대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온 게 수상했다. 통신사를 찾아가 통화내역을 뽑아달라고 했다. 그의 통화내역 중에서 하나의 번호를 찾아냈다. 주중에는 밤마다 한 시간 넘게 통화하지만 말에는 통화하지 않는 번호, 너 딱 걸렸어!


둘이 함께 있을 것 같은 토요일 저녁에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상대로 여자였다. 아주 앳된 목소리의.

"혹시 조다뻥 이라고 알아요?"

"네. 누구세요?"

"여자 친구요."

그녀가 '오빠~~'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뭐 하냐?"

어버버 하던 그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이렇게 된 게 다 내 탓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우리는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전화를 끊었다. 


일요일엔 너무 분해서 울었다. 월요일 아침에 그가 쓰고 있는 내 명의의 휴대폰을 정지시켰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데 너무나 신이 났다. 와~남자 친구가 바람피운 걸 잡아냈다는 게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다니!



몇 달 뒤에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다뻥의 여자 친구였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언니~저 알죠?"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요."

"언니, 그러지 마요. 저 조다뻥 그놈하고 헤어졌어요. 회사에 새로 들어온 애랑 바람났어요. 나쁜 새끼."

풋,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고것 참 쌤통이다.

"전 조다뻥이 언니랑 헤어졌다 그래서 만난 거였어요."

"아... 그랬구나. 이봐요. 그냥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하고 잊어요."

조다뻥의 전전 여친이 전 여친에게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오늘 길에서 얌체 운전자에게 욕하는 어느 운전자를 보며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래도 욕은 옳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 대놓고 욕을 했던 단 한 사람, 다뻥에게 욕 했던 걸 사과하고 싶다.

- 미안, 너 바람피웠을 때 개.새.끼.라고 욕할 게 아니라 다른 여자 만나줘서 고.맙.다.고 했어야 했어. 그리고 내가 너 같은 남자를 만나봤기에 남편 같은 좋은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고맙네.


다뻥을 만날 때 나는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덕분에 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성실하고 든든한 사람,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사람과 이십여 년을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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