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May 25. 2023

저를 해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그냥 퇴사하겠습니다."

  4년 넘게 근무한 패션회사 디자인실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표와 이사가 붙잡았지만 내 결심은 단호했다. 몇 달 전에 새로 온 실장은 파란 아이섀도와 망사스타킹을 즐기는 튀는 외모에 공감능력이 떨어져 대화하기가 짜증 나는 스타일이었다. 난 그 모든 걸 참을 수 있었지만 그만 두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였다. 오후에 시장조사를 가자고 데리고 나가서는 저녁 먹고 놀자며 끌고 다녔다. 둘이 비디오방에 간 적도 있다. 한창 일이 재밌던 때였는데 실장 때문에 회사 나가기가 싫었고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적당한 회사에서 팀장을 구하고 있었고 면접에 합격해 바로 이직했다. 입사 첫날, 회사 대표는 실장이 추천한 사람이 있었으나 내 자기소개서가 마음에 들어 직접 나를 뽑았다며 나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했다. 실장이 추천한 사람 대신 내가 왔다면 실장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실장은 내게 매우 친절했다. 그녀는 외모가 수수했고 말투도 다정해 오래 알고 지낸 언니 같았다. 내 밑에서 일할 두 명의 디자이너들도 착해 보였다. 나는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그들 속에 섞였다.


  대표는 남자친구를 궁금해했다. 그 당시 나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서른 여자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면 관심의 대상이 될 거 같아 가상의 남자친구를 하나 만들었다. 나이는 동갑이고 공기업 다니는데 워낙 바빠서 자주 못 만난다고. 이 정도 말했으면 더 이상 묻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 예상은 빗나갔고 대표는  번의 식사 때마다 남자친구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등을 물었다. 회사 대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에게 하기엔 이해 안 되는 질문이었는데 난 또 그걸 열심히 꾸며내 대답해 주었다.


  입사한 지 두어 달 정도 지났을 때 집을 이사하게 됐다. 출근시간이 시간이나 걸렸다. 월요일마다 오전 8시에 대표와 각 팀의 부서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나도 실장과 함께 그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거의 매일 야근에, 9시 출근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8시까지 나가 회의에 참석하는 날은 나도 모르게 계속 하품이 나왔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한 달 정도 지나 대표가 내게 회의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시장조사를 나간 백화점 커피숖에서 실장이 내게 말했다.

  "써니 팀장, 사장님이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말래."

  살짝 졸렸는데, 날벼락같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사장님 설득해 보려고 했는데 안될 거 같아. 많이 속상하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게."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대표를 찾아갔다. 회의 시간에 하품하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고 날마다 지각하고 일도 제대로 안 한다고 실장한테 보고 받고 있었다고 한다. 실장이 그런 보고를? 그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일단 하품한 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대표의 마음을 돌려보고 싶었다. 집을 갑자기 멀리 이사해서 너무 힘들었다고 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말을 들은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난 또 남자친구랑 살림이라도 차린 줄 알았지."

  촉촉해지려던 내 눈빛이 모욕감에 말라버렸다.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그 방을 나왔다.


  내가 대표한테 들은 이야기를 하자 실장은 당황했다. 실장은 내게 해고 통보를 하기 전에 이미 다른 팀장을 구해놨다. 원하는 거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한 말은 나를 하루빨리 내보내기 위한 속셈이었다. 지각 자주 한 것도 사실이고 일도 썩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고를 당하기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못 나간다고 버티자 실장은 내게 싸늘해졌다. 실장이 내 일을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나눠줬다. 나는 텅 빈 책상에 앉아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는데 할 일이 없어서라기보다 그 책이 너무 재밌었다. 며칠을 그렇게 버티다가 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내가 나간다고 하자 다시 다정해진 실장이 사 주는 스테이크를 먹고 그곳을 떠났다.


  나를 너무 좋아해 괴로웠던 실장을 피해 온 곳에서 좋은 사람 가면을 쓰고 있던 두 얼굴의 실장을 만난 나, 나는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이고 말았다.




  갑자기 백수가 된 나는 한 달짜리 여행 가방을 쌌다. 해고당한 것이 억울해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친구가 호주에 있었다. 오랫동안 친구로 곁을 지켜주던 가 1년 전에 호주로 떠난다고 했을 때, 비로소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잡아볼까? 이제 와서 무슨 명목으로 잡지? 그때 내지 못한 용기가 해고를 당하면서 생겨났다.


  호주에서의 한 달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맞은 봄날이었다.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봄날. 오페라 하우스, 그레이트 오션 로드,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박물관, 동물원, 공원, 해변에서 나의 봄날을 만끽했다. 호주에서 봄날을 함께한 친구는 1년 뒤 내 남편이 되었다.


  다시는 못 만날 뻔했던 우리를 연결해 준 건 나를 해고한 대표와 실장이다. 나는 그 은혜를 모르고 회사가 망하기를 열심히 빌었다. 하늘에 내 바람이 닿았는지 그 브랜드는 몇 년 뒤 없어졌다. 많이 늦었지만 사과하고 다.

  - 대표님, 저를 짜르기 전에 감 떨어지는 실장부터 짜르셨어야 했는데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알려드리지 않았어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때 저를 해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대표님과 실장을 만나 밥이라도 대접하고 싶은 심정인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난다.

이전 03화 바람피운 남자 친구가 고마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