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집으로 가는 길 이십여분, 뜨뜻한 자동차 시트 탓인지 맥주를 마신 탓인지 그 짧은 시간에 깜빡 잠이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잠이 깬 나는 입을 벌리고 침까지 흘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슬쩍 침을 닦아내고는 "아, 되게 피곤하네." 하고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춥다며 남편한테 딱 달라붙어집에 들어와서야 생각났다. 내가 복수를 다짐했다는 사실을... 잠깐 졸고는 그걸 까먹다니! 그러나 다시생각해 보니 복수를 꼭 화내면서 할 필요는 없다.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남편에게복수해야겠다. 그조차 복수당한다는 것을 알 수 없도록 감쪽같이!
토요일 아침, 더 자고 싶은 내게 와 밥 달라는 막내딸에게 속삭였다.
"너 까르보나라 먹고 싶지 않니?"
우리 집 파스타 요리사는 남편이다.
"아빠, 나 까르보나라 먹고 싶어. 빨리 일어나. 배 고파."
딸이 남편을 깨웠고 나는 잠을 더 잤다. 이게 내 첫 번째 감쪽같은 복수다.
오후에 남편에게 쇼핑 링크를 하나 보내고 말했다.
"자기야, 나 이거 사줘. 콜라겐 크림. 나 요새 너무 늙었어."
"안 늙었어."
"늙었다며? 어제 한강에서 그랬잖아."
"그건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렇다는 얘기지."
"그래도 나 그것 때문에 신경 쓰이니까 화장품 사야겠어. 그리고 앞으로 늙었다는 말 할 때마다 화장품 하나씩 살 거야."
이것은 상대의 잘못을 이용해서 이득을 챙긴 두 번째 감쪽같은 복수!
저녁으로 뭘 해 먹나 고민하고 있을 때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나 감바스 먹고 싶어. 아빠가 해주는 감바스 맛있어."
둘째 딸이 나의 세 번째 감쪽같은 복수를 도와줬다. 남편이 올리브유에 채소와 새우를 넣고 끓인 감바스와 구운 빵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누워서 어제 못 본 드라마 '모범택시'를 봤다. 모범택시는 복수 대행 서비스 업체 무지개 운수에서 나쁜 놈들에게 통쾌한 참 교육을 하는 내용이다. 내 남편 참 교육은 내가 직접 한다. 절대 티 나지 않게, 감쪽같이.
밤 열 시쯤 남편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우리 와인 한 잔 할까?"
"어 좋아. 지윤이 재우고 올게. 딱 기다려."
막내딸 옆에 누웠다. 딸은 잘 생각이 없는지 계속 조잘댄다. 딸보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남편이 자는 나를 흔들며 말했다.
"자기야, 자기야, 와인 안 마셔?"
"어 나.. 5분만 있다 나갈게..."
나는 7시간 5분 뒤에 일어났고 남편은 혼자 와인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며 외로운 토요일 밤을 보내야 했다. 이 네 번째 복수는 너무나 감쪽같아서 나 조차도 나중에야 깨달았다.
일요일에는 친정 식구들과 아버지 산소에 가서 잡초를 뽑고 떼를 사다가 새로 심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장인의 무덤을 정돈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남편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밤에 자기 전에 남편이 등을 긁어달라고 했다. 넙데데한 등짝을 박박 긁어주는데 남편이 물었다.
"나 머리 뒤쪽 휑하지?"
이번에야말로 진짜 복수할 기회가 왔다. 남편이 보지 못하는 뒤통수가 얼마나 휑한지 알려주면 남편이 내게 늙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니, 별로 티 안 나. 그리고 자기 머리숱까지 많으면 너무 멋져서 내가 불안해. 지금 딱 좋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해주면 당장은 통쾌할 수 있겠으나 남편이 자신감 떨어지고 속 상해하는 건 내게도 좋지 않다. 남편의 기분이 좋아야 아이들 파스타도 만들어주고 나한테 선물도 사주고 일도 열심히 하겠지. 상대를 즐겁게 만들어 더 많이 움직이게 하는 복수, 진짜 감쪽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걸 보니 내가 정말 늙었다는 거, 인정한다.
그래도 늙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니 남편이 또 내게 그 말을 한다면 이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노사연 님의 바램)
@Anna Lee 주말 동안 달달 볶아서 피곤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제가 기운이 달려서 못하겠더라고요. 복수, 미움 이런 거 다 기운이 남아서 하는 건가봐요 ㅎㅎ 여긴 비가 와요.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 글 중에 비와 관련된 글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아이둘 키우며 힘들 때 주말에 누워 지내는 옆지기가 안예뻐서 늙은 나이가 된다면 정말 젊은 시절의 구원을 갚아줘야지 하고 다짐했었습니다. 먼저 머리숱이 줄어드는 옆지기를 보며 구원갚기는 고사하고 자식들 앞에서 옆지기 편들어주기 전문이 되고 있습니다. ㅎㅎ 이제부터 작가님의 지혜를 배워 구원갚기를 실천해볼 요량입니다.
@오월 나무 네 ㅠㅠ 복수 하려고 마음 먹은 것도 잠시, 남편을 들여다보니 저 보다 더 늙어있네요 ㅠㅠ 작가님의 글처럼 은퇴 후에 다시 허니문으로 알콩달콩 살기 위해 지금부터 사이좋게 지내려고 합니다 ㅎㅎ 즐거운 날 보내세요:)
@정수만 아 ㅎㅎ 작가님이 박수 쳐 주시니 기분은 좋지만 '현숙'이란 말을 들으니 참 부끄럽네요. 제가 좀 나이에 비해 많이 철이 덜 들어서요 ㅎㅎ 작가님 지난 글들을 다 지우신 걸 보고 새로운 준비를 하시나 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이다 사실 저도 몇 해 전까지는 레알 복수극을 펼쳤는데,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기운이 달리네요. 피곤해요. 그냥 웃고 넘어가는 게 속편하고요 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케이트쌤 사실 익어간다는 표현도 좀 슬프지만 (다 익어 결국 썩게될 것이 연상돼서요^^;;) 늙는다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말인 것같아요 ㅎㅎ
댓글 감사해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Anna Lee 주말 동안 달달 볶아서 피곤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제가 기운이 달려서 못하겠더라고요. 복수, 미움 이런 거 다 기운이 남아서 하는 건가봐요 ㅎㅎ
여긴 비가 와요.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 글 중에 비와 관련된 글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이혜연 최고의 복수는 그 일을 잊고 내가 더 행복해 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복수라는 걸 마음 먹는 순간 너무 피곤해서 말이죠 ㅎㅎ
작가님도 제 맘 같으실 듯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이은호 40대 중반까지는 피 터지게 싸운 것 같은데 이제 싸울 기운이 없어서 그런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지네요. 인생 선배이신 작가님도 그렇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예나네 네 딸들이 있어 든든하네요.
작가님과 작가님의 따님들처럼 다정한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내는 게 꿈입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유미래 음... 남편이 요리를 잘 하는데 하고 싶을 때만 해서 좀 불만이예요 ㅎㅎ
부부 간에 복수라는 거 참 의미없음을 깨달았어요.
작가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겠죠? ㅎㅎ
즐거운 날 보내세요:)
@아가다의 작은섬 오늘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콩나물국이 무지하게 땡기네요.
어디선가 콩나물국 끓이는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말이죠 ㅎㅎ
작가님과 부모님 이야기 잘 읽고 있어요. 행복한 날 보내세요:)
@일 시 작 아마 남편이 안따라줬으면 이렇게 잔잔한 복수극 상황이 아니었을텐데, 남편이 조용히 요리도 하고 선물도 사주고 그래서 나름 아름다운 복수극으로 끝이 났어요 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기쁩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자표심 복수천국 ㅋㅋㅋ 재밌는 말이네요. 역시 작가님 센스쟁이~^^
몸살은 좀 괜찮으신지, 날씨가 오락가락 하네요.
빨리 건강 회복하시고 즐거운 날 보내세요:)
@윤아람 ㅎㅎㅎ 작가님 잘 읽고 있다는 한마디가 저에게는 큰 격려입니다. 감사합니다 ^^
@그대로 동행 탁구치며 늦은 시간까지 안들어오는 남편에게 어떤 반전의 복수를 하셨을까 매우 궁금해요 ㅎㅎ 아이가 셋이면 남편의 건강이 매우 중요하죠^^
감기 조심 하시고 즐거운 날 보내세요:)
@프레즌트 제 거짓말이 언제까지 통할지 모르겠어서 적금 들어놔야 겠어요.
머리 심어주게요 ㅎㅎ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날 보내세요:)
@코알라 반성합니다. 글이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아요. 저 화도 잘 내고 짜증도 엄청난데 노력 중입니다. 작가님 마음이 훨씬 넓어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Starry Garden 작가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을 조금 떼다가 제 글에 담았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보내세요:)
@김호섭 즐겁게 읽으셨다니 제 기분도 막 즐거워집니다.
공부 하시느라 바쁘신 와중에 들러 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아이둘 키우며 힘들 때 주말에 누워 지내는 옆지기가 안예뻐서 늙은 나이가 된다면 정말 젊은 시절의 구원을 갚아줘야지 하고 다짐했었습니다. 먼저 머리숱이 줄어드는 옆지기를 보며 구원갚기는 고사하고 자식들 앞에서 옆지기 편들어주기 전문이 되고 있습니다. ㅎㅎ 이제부터 작가님의 지혜를 배워 구원갚기를 실천해볼 요량입니다.
@Killara 아이고, 들어보니 제가 작가님께 한 수 배워야 겠습니다. 저도 애들 어릴 때는 나이들고 두고보자 싶었는데 점점 측은지심이 생기네요 ㅎㅎ 작가님의 구원갚기 어떨까 살짝 궁금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