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May 29. 2024

남편의 이쁜 짓

방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놓고 말없이 귀가시간이 늦은 고1 딸에게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기분이 가라앉으며 맥주 한잔이 생각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안 해?"

"퇴근했는데 골프 연습장 가는 중이야."

"응. 갔다 와. 나는 기분이 안 좋아서 일찍 잠이나 자야겠다."


저녁을 먹고 치운 뒤,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내 말이 신경 쓰여서 연습장을 가다가 차를 돌려 왔다며 밥을 달라고 했다. 순간 짜증이 났다. 이건 날 위한 게 아니잖아.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들어왔다며 밥을 차려 달라니...! 그렇다고 나름 생각해서 일찍 온 남편한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냈다.


"고기 볶고 있을 테니까, 이 쓰레기 좀 버리고 와."

내 말을 듣고 남편이 나를 쳐다본다. 남편은 평소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니는 걸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쓰레기 배출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남편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거라는 기대 없이 쓰레기봉투가 보이길래 그냥 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웬일로 말없이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가라앉았던 기분이 확 좋아졌다. 딸내미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남편이 들고나간 쓰레기봉투와 함께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남편과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나는 세상 걱정 없는 사람이 됐다.


다음 날 아침, 고3 아들을 몇 번이나 깨웠는데 일어나질 않는다. 중학교 때부터 내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등교를 하던 아이였는데, 요즘은 학교에 지각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참다 참다 잔소리 폭탄을 쏟아내 아이를 깨운 다음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 안경을 안 썼구나.'

안경은 안방 화장대 위에 놓여있었다. 안방 쪽을 보니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며 화장대 앞에 서 있다.

"자기야, 거기 안경 있지? 나올 때 좀 가지고 나와줘."


남편이 안경을 들고 나왔다. 안경을 보더니 안경알에 입김을 불고 티셔츠로 싹싹 닦아서 건네준다.

"아니, 왜 옷에다 닦아? 옷 더러워지게."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서도, 내 입은 웃고 있었다.


"내가 자기 때문에 산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육아는 나 몰라라 하고 바깥일에만 열심인 남편이 꼴 보기 싫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 이쁜 짓 보는 낙으로 살았다. 


요즘에는 사춘기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힘든 날이 많다. 그런 날에는 남편이 내 비위를 맞춰주며 이쁜 짓을 하곤 한다. 아이들보다 남편이 더 이쁜 요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김치를 놔두고 다이어트를 할 순 없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