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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역할

역할 이론

by 아옹다옹하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와 나는 가사에 대한 역할을 분담했다. 밥, 설거지, 화장실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는 내가 하고 빨래와 옷 정리는 아내가 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같이 했다. 다소 내쪽으로 치우친 불공정 계약이었으나 을의 입장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양이를 돌보는 데에도 역할을 달리했다. 화장실 모래를 버리고 털을 밀고 물그릇을 씻는 일은 내 몫이었다. 발톱 자르기, 자동급이기에 사료 채우기, 귀 청소와 양치는 아내가 했다. 발톱을 자르고 귀나 이를 청소할 때 아옹이 다옹이는 못 견디고 심하게 발버둥쳤다. 아내는 악역은 자기가 다해서 미움받는다고 나를 구박했다. 특히 아옹이는 아내가 나타나면 살살 눈치를 보면서 도망갈 준비를 하기도 했다. 자꾸 억지로 안고 품 안에 가두려고 해서 그런 거라고 나무랐더니 아내는 그럼 네가 한 번 당해보라며 내 목을 졸랐다. 언젠가 아옹이와 다옹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존재 그 자체가 너희 역할이란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은 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실제 육아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맛보기 정도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녀석들을 입양하고 나서 아내와 나는 아주 조금 부지런해졌다. 그냥 널브러져 제 몸 하나 못 가누던 우리는 보호자로서 최소한의 소임은 해야만 했다. 종종 떠나던 일박 이일의 여행도 당일치기로 마쳤다. 경제 소비에서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기에 한껏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고양이한테서 조급함은 금물이어서 인내와 여유를 배워가고 있었다. 털과 냄새 때문에 환기를 자주 해야만 했는데, 우리 안에 있던 이기와 권태가 안 좋은 공기와 함께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역할 이론이란 인간의 행동을 내적인 소질, 재능, 욕망 등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집단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이론이었다. 역할은 사회적 관계에서 개인이 가지는 특정한 지위나 범주에 관련된 모든 행동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본능적인 모성애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어머니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역할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욕망과 감정 같은 것들이 따라온다고 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한 담임 선생님은 반에서 제일 말썽쟁이를 반장으로 뽑았다. 규칙과 규율에 제일 저촉되는 아이를 직책으로 통제하는 동시에 책임감을 발동시켜 성실성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반장이 되고 나서 말썽쟁이는 거짓말처럼 변했다. 여럿이 약속한 질서에 순응하는가 하면 자신을 절제하고 나아가 반 아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함께 사고를 치고 다니던 나와 일부 친구들은 반장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고 변절자 압잡이라고 비난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다. 함께 반장을 욕하던 무리 중 하나가 짝사랑에 빠졌다. 공교롭게도 녀석은 전교에서 성적으로 손가락 안에 들던 모범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녀석의 성적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물론 뒤에서부터. 터무니없이 자신감은 또 충만해서 주저 없이 바로 고백했다. 여자애는 당돌하게도 시험 성적으로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만나주겠다며 미션임파서블을 던져 주었다. 보기보다 지독하네, 악질도 그런 악질이 없구나,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지. 영혼이 상처받았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녀석은 이제부터 공부란 걸 해 보겠다고 했다. 벌써 두 번째 변절자가 발생함에 따라 조직은 혼란에 빠졌다. 더이상의 이탈은 곤란했기에 어떻게든 녀석을 설득하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한 성적을 내고 여학생과 사귀게 되었다. 우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조직의 존재, 추구하던 가치와 철학,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게는 부여된 역할이 없었기 때문에 기대도 없었고 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나는 삶이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세상이 던지는 기대와 질문이 나를 더 진보하게 했다. 직장에서의 직책, 가정에서 자녀이자 남편, 고양이들의 집사, 이런저런 역할과 기대가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왔다고 여겼다.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은 소망과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치는 일은 고귀한 일이다. 실은 변절자들이 조직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내심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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