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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Jan 22. 2024

좋아하는 소리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누구에게나 특별히 좋아하는 소리가 존재했다. 소리는 머리에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각인되어 사유 없이도 감정을 지배했다. 수많은 소리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은 비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였다. 고향에 내려와 막 이직했을 때 한참 마음이 공허했다. 모든 사이클에는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는 법이지만 그 시절엔 그걸 몰랐다. 갱도의 막장에서 광산이 무너진 것처럼 다시는 빛을 볼 수 없을까봐 낙심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는데,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막막하고 마음 둘 곳이 없어 버거울 때면 바다로 향했다. 다행히도 바다는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별한 행위 없이 밤바다를 응시하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어둠은 시야만을 제압할 수 있을 뿐 소리에는 압도당했다. 일렁이는 너울이 내는 목소리는 처음에는 마음을 휙 하니 흔들어 놓았다가 이내 차분하게 보듬어 주었다. 맨땅바닥에 주저앉기 일보 직전에 가까스로 나를 부축한 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소리였다. 심성이 맑은 이의 청아한 웃음소리, 아기가 잠잘 때 내는 새근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는 누군가를 먹이기 위한 요리사의 성심이 담겨 있어서 좋아했다. 최근 들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건 고양이가 내는 소리였다. 다옹이가 기분 좋을 때 몸을 갖다 대면 골골골 소리를 냈다. 네가 가까이에 있어서 지금 기분이 좋아. 너를 신뢰할 수 있으니까 계속 곁에 있어. 녀석은 마치 그렇게 고백하듯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 아옹이는 고음으로 '후루룩' 소리를 냈다. 평소 애교가 전혀 없던 녀석이 몸을 비비며 반가운 척을 하면 감동의 파장이 마음에 일었다. 원래 감정 표현에 인색하기 때문에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셈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수시로 흉내를 내며 아옹이를 향해 추파를 던졌다. 아옹아, 여느 개냥이들처럼 애교와 사랑으로 나를 대해 주면 안 되겠니. 아무리 마음에 담고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 길이 없단다. 끈질긴 구애의 소리에도 아옹이는 모질게 외면했다. 자신을 쫓던 개를 지붕에서 내려다보던 닭처럼 먼 산 바라보듯 나를 응시했다.


 마냥 바닥을 향할 것 같던 하강은 추락을 멈추고 드디어 횡보와 상승을 시작했다. 더 괜찮은 회사에 이직할 수 있었고 반려자도 만났다. 연봉이 높진 않았지만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입사하고 10년 넘게 스트레스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그가 오면서 드디어 난관에 봉착했다. 파견에서 돌아온 부서의 직속 책임자, 그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랬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서 한 기가 막힌 명언이었다. 신념이란 표현은 과분하고, 믿음 정도로 해석하면 딱 맞았다. 한마디로 "제일 구제불능은 무식한데 확고한 믿음을 가진 인간" 이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의 믿음은 고집이자 아집이었다. 신념이 확고한 사람은 무서웠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보다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말처럼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었다. 그의 믿음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뒀다. 그는 항상 직원들에게 의향을 물었지만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는 작업일 뿐 한 번도 타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무지한 그는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종종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엉뚱한 산의 정상에 올랐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불평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산도 한 번은 꼭 왔어야 했으며 시행착오는 조직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합리화했다. 그는 간악무도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다정한 말투를 사용했다. 사람의 심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나는 단번에 그가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라는 것을 간파했다.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내게 보고서를 쓰게 하거나 결재를 미루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참으로 유치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으나 상사인 그와의 기싸움은 애초에 불리한 대결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직원들과 결속하여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미워할수록 병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안간힘을 써도 모으기 힘들었지만 미움과 증오는 별 노력 없이도 가득차 마음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가끔 영혼이 상처 입은 날엔 퇴근하면서 다짐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짜증과 피로, 신경질을 반려자에게 들키지 않게 숨기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애쓰지 않으면 부패하고 더러운 감정은 타인에게 전염될 확률이 높았다. 다옹이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옹이를 품에 안고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댔다.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와 꼬순내가 마음을 편안하게 정돈시켜 주었다. 다옹아, 만약 잘 모르는 사람이 다정하고 친근하게 츄르 사준다고 접근하면 발톱으로 얼굴을 확 할퀴어 버려. 알았지! 아파트 단지로 아내의 차가 진입하자 알림음이 울렸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 있던 아옹이, 장난감 공을 몰고 다니던 다옹이가 불현듯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고양이는 소리에 민감했다. 그리고 몇 가지 소리를 암기하고 있었다. 아옹이와 다옹이는 아내가 문을 열 때까지 현관 앞을 지키고 있었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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