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옹다옹하다 Feb 26. 2024

정월대보름

플랭크 자세와 엎드려뻗쳐

 기안문의 결재를 받기 위해 본사에 위치한 경영관리본부 사무실을 찾았다. 전에 같이 일했던 직원들이 돌아온 탕자를 맞듯 극진히 반겨 주었다. 손도 잡아주고 차도 내주었다. 피부 좋아졌다. 뭐 좋은 일 있어? 얼굴 폈네. 다들 인사치레로 덕담만을 건넸다. 그것은 탕자에 대한 예우이자 불문율이었다. 근데 톰과 제리처럼 아웅다웅하며 실없는 농담을 잘 주고받던 선배 하나가 아니나다를까 규칙을 깼다. 요즘 거긴 일이 편한가 봐. 얼굴이 아주 달덩이가 됐네. 대보름에 달 안 봐도 되겠어. 주위에 있던 여직원들이 박장대소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상희 씨, 살쪘지? 장가갔다고 관리 안 해? 얼굴에 윤기가 돈다는 둥 칭찬 일색이던 여론이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공격했다. 선동에 성공한 선배는 직원들 뒤편에서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며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이래 봬도 매일 운동해. 강아지 데리고 30분씩 산책한다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선배가 얄밉게 또 끼어들었다. 무슨 강아지? 치와와? 직원들이 일동 재차 폭소했다. 공격할 만한 빈틈을 발견하자 선배는 하이에나처럼 상처를 물어뜯었다. 이런, 젠장맞을! 일단 후퇴다. 오늘의 수모는 잊지 않으마. 결재를 득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룸미러에 비친 얼굴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는 엄격하지가 못해 객관화가 어려웠다. 매일 보지만 익숙함 때문에 눈에 보일 만큼의 확연한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다. 자세히 보니 살이 찌기는 쪘다. 사실 알면서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다. 비만도 죄가 된다면 미필적고의에 의한 비만죄가 성립되었다. 결국 체중계에 올라갔다. 기계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이런, 어쩐지 요즘 입맛이 돈다 했더니. 시나브로 인생 최고 몸무게를 경신했다. 더이상 웃을 일이 아니었다. 강아지 산책만으로 살을 빼는 것은 턱없이 무리였다. 아내와 상의 끝에 급한 대로 매일 저녁 플랭크 자세 5분, 스쿼트 100회를 하기로 했다. 다용도실에 처박혀 있던 요가 매트를 꺼냈다. 사람의 손길이 끊긴 매트에는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내와 나는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동작으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았다.

 스쿼트는 양발을 좌우로 벌리고 서서 등을 편 채 무릎을 구부렸다가 펴는 운동이었다. 주로 하체를 단련시키기 위해 했다. 100회를 하고 나니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내는 느리고 정확한 자세로 움직이는 반면 나는 쉽게 흐트러졌다. 꾀를 부리기 위해 숫자를 건너뛰기도 했다. 확실히 스쿼트는 아내가 나보다 나았다. 하지만 팔꿈치를 직각으로 만든 후 몸이 일직선이 되게 엎드린 상태에서 버티는 플랭크 자세는 반대였다. 아무래도 근육량이 부족한 여성보다는 남성이 유리했다. 코어 근육과 복근을 주로 강화시키며 전신 운동도 되는 플랭크 자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내는 첫날 2분을 겨우 버텼고 나는 3분 동안 자세를 지속하였다. 오빠, 근육 돼지였어? 왜 이렇게 잘해? 그러게, 나 좀 하네. 어렸을 때부터 엎드려뻗치는 기합을 많이 받아서 단련이 됐나 봐. 2분만 더 해볼까. 바닥을 보고 다시 엎드리자 갑자기 유년의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확 스쳐지나갔다.


 칠판 앞에 나와 엎드려뻗치고 있는 남자가 있다. 20분째 엎드려 있는 남자는 미동조차 없다. 교실의 나무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눈에 초점이 없다.

 노총각인 교사는 동료들 사이에서 일명 괴짜라고 불린다. 3학년 2반의 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에게는 특이점이 있다. 체벌을 하긴 하지만 민주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늘 유머를 곁들인다. 숙제를 안 해온 아이들에게는 몸소 당할 체벌을 선택하게 해 준다. 종아리 회초리 3대, 자로 손바닥 맞기 5대, 사물함 앞에서 손 들기 20분, 엎드려뻗쳐 30분. 아이들마다 선호하는 체벌의 방식이 존재한다. 숙제 안 해온 사람 앞으로 나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듯 남자는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남자는 숙제를 하는 대신 엎드려뻗쳐를 선택한 지 오래이다. 오늘도냐? 남자는 교사의 물음에 고개를 느리게 두 번 끄덕이더니 호기롭게 말한다. 주먹도 쥘까요? 남자의 갑작스러운 도발에 교사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린다. 오호, 패기 좋고. 오케이, 주먹 가자! 비록 적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듯 교사는 남자에게 존중을 표한다. 엎드린 지 5분이 지나자 꿈지럭거리던 남자의 몸이 굳기 시작한다. 그제야 슬슬 남자의 무기가 발동한다. 남자는 투명인간이 되어 교사의 회초리와 자를 화장실로 옮겨 놓는 상상을 한다. 친구들을 자주 괴롭히던 승재의 바지에 물을 한 바가지 쏟고 선생님 승재 오줌 쌌어요, 라고 외치는 장면을 그려 본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기도 하고, 몸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해 독수리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공상을 한다. 거대한 고질라에 맞서기 위해 태권도 로봇을 조종하는 상상은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것도 지겨우면 동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금수의 왕이 되는 환상 속에 자신을 가둔다. 오늘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원시인에게 성냥을 선물한다. 원시인에게 한글을 알려주는 바람에 다시 돌아온 현재에는 한글이 세계 공통어가 되어 있다. 공상을 하는 시간에는 아무도 남자를 방해할 수 없다. 남자의 가상 세계에 실제 사실과 상태는 범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의 아픔과 한숨은 상상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 이제 그만 일어나. 30분 지났어! 교사의 걱정 어린 꾸중에 남자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냥 숙제 해 오면 안 되냐? 교사의 항복 선언에 남자는 가볍게 윙크를 날리고 자리로 돌아간다.

 커다랗고 동그랗고 벌건 달이 뜬다. 아이들은 볏짚과 나뭇가지를 넣은 깡통에 불을 붙인 다음 힘껏 돌린다. 작게 구멍난 깡통이 돌아갈 때마다 붕붕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 소리의 끝에 불의 파편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아름답게 따라온다. 들판의 곳곳에서 일제히 만들어지는 붉은 원은 보름달 못지않은 장관을 만들어낸다. 누군가 깡통을 하늘로 높이 던지자 숯 조각의 잔해가 흩어지면서 시뻘건 포물선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의 소원을 빈다. 남자는 소원을 비는 대신 원시인에게 불을 가져다주는 상상을 이어간다. 남자의 세계 속에서 원시인과 남자는 함께 쥐불놀이를 한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날엔 나처럼 불을 빙빙 돌려. 남자의 말에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익살스럽게 윙크를 날린다.

작가의 이전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