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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안 Aug 12. 2022

마음을 고무시키는 문장

발돋움 할 결심

모든 자기소개서의 시작을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의 첫 단락 속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대문호가 쓴 믿음직한 소설을 빌려와 시작하면 일단 기세가 남달라 보일 것 같았고 어딘가 번듯한 인상을 줄 것 같았다. 또한 도저히 자신에 대해 쓸 때 어떤 말로 말문을 떼야할지 모를 막막함이 해소 되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일의 어색함을 중화시켜줄 것 같았다. 기출 변형처럼 그 문장을 다시 소환하자면 내용은 이렇다.


“별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주 민망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글과는 그 집필 목적이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성년』,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이상룡 옮김, 11p.


나는 이 마법의 문단을 온갖 기업의 자기소개서가 요구하는 분량에 따라 맞춰서 인용했다. 몇 천자를 요구하는 기업에는 저 단락을 통째로 갖다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며 말문을 뗐고 요구하는 분량이 적을 때에는 단락 속 첫 구절만 인용했다. 정작 지금 누군가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죄와 벌』과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모두 섞어 이야기해버릴 만큼 희미한데도 첫 문장만큼은 주기도문처럼 욀 수 있다. 저 문장을 빌려오지 않으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민망함과 어색함을, 그리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며 도취된 스스로를 변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꿔 말하자면 대문호의 문장을 빌어 포문을 여는 기세와 약간의 겸양을 동시에 갖춘 척 하고 약간 거리를 둔 척 하고나면 내게 마음껏 도취돼 잘도 떠들어도 그게 꼴 사납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요구된 ‘자기소개’ 라는 항목을 분량만큼 순순히 채워나갈 수 있는 동력이 필요했다. 그 문장을 통해 고무되지 않으면, 겸손한 척 뻔뻔하게 자기 이야길 할 수 없었고, 동시에 그 문장을 통해 고무되지 않아도 잘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과 나는 선을 긋고 싶었다. 선이 제대로 그어진 건지 읽는 이에게 선이 보이긴 한 건지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그 어떤 인사팀도 나의 서류를 통과시켜 주지 않았고, 나는 보기 좋게 한 학기 내내 쓴 자기소개서를 모두 광탈한 채로 졸업했다. 그래, 취업은 어떻게 됐니 같은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으려던 졸업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구경을 해 보고 싶다는 부모님의 등살에 못 이겨 가야만 했다. 하필 그 때 무슨 바람이 불어 어울리지도 않는 숏 컷을 해서 학사모 밖으로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삐져나왔고 줄서서 배급 받아 입은 졸업가운은 키가 작아서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면 질질 끌릴 정도로 길었다. 싸이월드 클럽에 올라온 단체 사진 속 나는 가운 밑에 발끝이 간신히 보이는 채로 어색함에 정면도 못 본 채 학과장님을 쳐다보는 옆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굶어죽으란 법은 없어서 여기 도움 받고 저기 도움 받아 일을 시작했고, 직업을 몇 번이나 갈아치우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고 살았다. 나는 한 번도 자립하지 못했고 꾸준히 누군가가 보호자로서 존재했으며 하여 풀칠치고 분에 넘치는 날도 많았다. 배가 불렀는지, 남이 내 입에 발라주는 풀이 못 미더웠는지, 입에 안 맞았는지, 풀 맛이 지겨웠는지……. 혹은 풀칠 해주는 손이 문제였는지. 사는 내내 미끈한 풀 안에 모래라도 섞인 듯 입안이 버석대서 시키지도 않은 자립을 희구했다. 이 풀이 망해서 풀은커녕 목 막히는 가루 채 입에 처넣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내 손으로 내가 쑨 풀, 그리고 내가 풀을 쑬 수 있는 내 자리, 재료를 살 돈, 그리고…. 헤어질 결심?(농담) 그맘때 나를 움직인 문장은 공교롭게도 소설도 노래 가사도 아닌 노래의 앨범 소개 글이었다.


스물세 살의 아이유도, 스물다섯의 아이유도, 작년의 아이유도 아닌 지금의 저는 이제 아무 의문 없이 이 다음으로 갑니다. 안녕♥
아이유(IU) 정규 5집 [LILAC] 10번 트랙 ‘에필로그’ 소개 글 발췌


안타깝게도 저 모든 나이와 나는 멀어졌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여하간 나 또한 스물도 스물 둘도 스물여섯도 그리고 2020년의 나도 아니란 것이었다. “지금의 저는 이제 아무 의문 없이 이 다음으로 갑니다. 안녕♥” 이보다 더 간결하고 담백하게 내 마음을 고무시킨 문장을 살면서 못 만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2021년에 이 앨범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면 눈을 감고 소설 속 문장을 암송하듯 이 문장을 뇌까렸다. “내 마음에 아무 의문이 없어 난 이 다음으로 가요….” 살면서 또 만나지겠다는 문장이 이어지는 노래 가사는 생략한 채.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비록 내게 주어진 다음 선택지가 풀칠 해주는 보호자를 바꾸는 것뿐이었다고 해도, 전진을 위한 후퇴 어쩌고 하며 어쨌거나 혼자만의 풀을 쑬 기회가 다시 생긴 지금을 귀하게 여기며. 나는 2021년 하반기의 문장과 새롭게 만난다.


…(전략) 그리고 마침내 여름과 내 발이 도로 맞은편의 연석에 올라섰을 때, 나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로드킬』아밀, 비채, 56p.


마음에 아무 의문이 없어도 작년은커녕 어제의 내가 아니어도 어떤 날은 죄의식이 어깨에 쏟아져 폭우에 젖은 사람처럼 떨며 잠을 설쳤다. 현관 앞을 벗어나지 못하는 강아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걔가 느낄 외로움은 내가 어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그 애 옆에 누워 지금의 걔가 덜 외롭기만 바랐다. 일이 그렇게 됐지만, 내가 만들었지만, 그렇지만 나는 네 옆에 있고 내가 아무리 작년과도 재작년과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알아듣고 있는지 마는지도 모르지만 매일 매일 이야기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기간에도 왕복 다섯 시간 거리를 매일 매일 찾아가서 종일 담요에 둘둘 싸인 아기를 안고 수의 테크니션들이 수군대는 말을 뒤로한 채 이야기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착하고 용감하고 씩씩한 나의 아기. 너는 나의 아기야. 너를 매일 매일 사랑하고 내 입에 가성비 풀을 칠할 지라도 너한테는 제일 좋은 풀을 칠해 줄 거야. 그런 이야기를 매일 매일 하면서 아기를 보러 버스에 올라탈 때, 내려오는 차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눈을 감고 어두운 산 속의 도로와 어떻게 생겼을 지도 모를 연석에 발을 내딛는 상상을 했다.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문지방을 볼 때면 아기가 돌아오면 걸을 수 있을까, 걸어서 이 문턱을 넘나들며 오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릴 때 나는 문지방에 올라서서 문틀을 잡았다 문고리를 잡았다 하며 뱅뱅 돌면서 놀기를 좋아했다. 발바닥의 아치가 문지방에 꼭 맞는 느낌은 내가 테트리스의 기다란 조각이 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온갖 어른들은 “문지방 밟으면 복 나간다.” 같은 말로 내 흥을 망쳐 놨다. 병원에서 돌아와 아기가 문지방을 넘을지 넘지 못할지를 고민하다 문득 지금이 불운이 내가 어릴 때 숱하게 문지방을 밟은 업보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날부터 나는 문지방을 절대 밟지 않고 넘나들었다.


그리고 퇴원 후 돌아온 아기는 처음엔 절뚝이고 휘청거리다 지금은 기세 좋게 집안 모든 곳을 휘젓고 문지방 따위는 우습게 짓밟고 다닌다. 쟤가 저 업보를 어쩌려고 그럴까? 웃으며 생각하지만 그 업보가 내게 온다면, 내가 밟고 다닌 문지방의 업보를 쟤가 받아온 거라면 쟤가 휘젓고 다녀 생길 업보는 부디 나에게만 왔으면 좋겠다. 오직 나에게만. 내가 가상의 연석을 밟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네 의사도 묻지 않고 너를 안고 걸어온 덕분에 문지방의 업보가 네게 간 것이라면. 네가 만들 업보는 내게만 왔으면 좋겠다고. 문지방 밟으면 복 나간다는 문장을 이런 식으로 되 뇌일 줄은 몰랐지만.


2022년. 이 풀 맛은 어떤가 하고 시작한 풀 쑤기는 네 맛도 내 맛도 모르기는커녕 이 맛이 아닌 게 너무 분명한데 도저히 무를 수가 없어서 매일을 죽고 싶다며 울어서(문자 그대로) 옆집을 고민하게 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또 운명적으로 나를 고무시키는 문장을 만난다. 하지만 이 문장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소중해서, 입으로든 글로든 내뱉으면 내 행복이 숨처럼 뿜어져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릴까 봐, 그래서 조금이라도 작아질까봐 옮겨 적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어떤 마음을 길어 올렸고, 어떤 일을 해냈는지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그 문장을 매일 매일 떠올리며, 가본 적이 없는 곳에 나를 데려갔고, 이제 나는 내가 꽤 마음에 든다. 내년은 또 어떤 문장이 내 마음을 발돋움하게 할지 몰라. 하지만 남은 여름과 다가올 가을, 겨울은 그 문장을 매일 뇌까리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풀을 쑤고, 이 풀을 쑬 방을 가꾸고. 이곳은 나의 방, 나의 정원, 그리고 나의 병참기지이다. 이 곳의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모든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장의 효력이 끝나도, 나는 다음, 그 다음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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