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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ul 05. 2023

엄마의 손

오늘 퇴근 후 혼자서 설렁탕집에 들어가 어제와 같은 갈비탕을 시키고 잠시 비는 시간에 시인들의 공동 깨톡을 열었더니 한 시인님으로부터 “사랑하는 마음은 마음을 쏟아야하는 관심이자 존재에 대한 나와의 약속입니다”라는 구절과 함께 동영상 하나를 띄워 놓았다. 밥 먹으면서 이 내용을 한번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넓은 논이 감당할 수 없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져 벼가 누렇게 타들어가는 상황에서 나 흔자의 눈물 만으로도 그 논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영상의 내용은 30대 중반의 남자, 여자에게 눈을 가린 채,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직업을 알아맞히는 내용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자기 나름의 철학대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직업을 맞추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후 안대를 벗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잊지 못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그들의 엄마였다.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등줄에 식은땀이 흘렀을까하는 생각과, 엄마가 그들이 맞추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한 것이 자신의 엄마였다니 또한 얼마나 부끄러웠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갈비탕은 나왔는데 넘어 가질 않는다. 눈물이 고여 갈비탕 안을 떨어지고, 소리도 못 내고 꾸역꾸역 삼키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구경꺼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했다. 갑자기 차오르는 감정과 옛날 엄마와의 모습이 겹쳐 한참을 눈물 콧물을 닦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다음 주인의 인사에 답하지 못하고 나왔다.     

“우리 엄마가 지금 나의 나이 일때, 아니 그 보담은 약간은 젊으실때 나의 곁을 떠났습니다. 농삿일로 온 손에 피못이 박혀 내가 어릴 때도 엄마의 손을 보고 참 애처롭게 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영상처럼, 직업을 알아맞히지 못하더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습니다. 울 엄마 손은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산속에 고구마 밭에 물주고 내려올 때 미끄러질까봐 엄마 손을 잡고 내려왔는데 사람 손이 아닌 듯 하더이다. 지금 잡아도 엄마 손엔 눈물로 가득 고인 땀이 저의 손을 덮을 것 같습니다. 목련의 꽃잎이 엄마의 치마 같고, 자목련의 꽃잎이 흙 묻은 엄마의 치맛자락 같아서 봄이 오도록 만 기다립니다. 봄이 비켜갈까 봐 집의 테라스에 목련을 심었습니다. 시인이면 무엇 합니까, 보고 싶다, 그립다, 사랑한다, 이보다 큰 따스한 말조차 지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     


울 엄마는 키가 아주 작은 분이셨는데,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면 키의 3배 정도나 되는 도리깨를 그렇게 힘 있게 내려쳐, 보리 낱알들이 놀라 아주 멀리 도망가곤 했습니다. 벼 키울 때, 논매러 가면 이랑사이로 벼는 흔들리는데 사람을 보이지 않는 아주 기막힌 일들도 있었습니다. 집에는 조그마한 남새밭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채소들을 키워 보리밥 상치 쌈에 된장 발라 먹고 찬물 한번 마시면 그렇게 힘이 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몸아 좋지 않아도 밭일을 나갈 때는 소가 큰 눈을 껌뻑이며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하였습니다. 개, 목에 방울을 단 젖짜는 염소, 돼지, 닭도 엄마를 그렇게 따르고 좋아 했습니다.


 그러다 1969년 9월 17일 엄청난 태풍과 폭우가 들이 닥쳐, 울 엄마가 그렇게 노력하고 일구었던 모든 터전을 밤새 홍수가 모두 쓸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도 벌근 눈으로 통곡보다는 저를 품안에 안아 주시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새벽 3시에 밥을 하여 아들을 부산의 대학까지 통학시킨 후, 다시 밥을 하여 다음 낭군을 진해로 출근 시키고 해만 뜨면 그 몸으로 잠시 누워보지도 못한 채 들로 산으로 밭으로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 크고 깊고 높은 한을 무엇으로 추스렸겠습니까? 저는 기차로 마산, 마산중학교까지, 그 때는 증기기관차 였습니다, 통학을 하면서, 첫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 때 시험을 치고 마음에 들지 않아 역에서 집까지 펑펑 울고 갔습니다.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울 엄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촌아이가 도시아이를 따라잡기 어려워서, 엄마 고생 일에 대하여 시험도 망쳤으니 스스로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울 엄마는 잘 살 운이 없었나 봅니다. 보통사람이 그렇게 일을 했으면 갑부는 못되어도 등을 비비며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한 번 떵떵거려보지도 못 한 채, 끝까지 이 자식의 돌봄을 한번도 받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내가 50 중반쯤 되었을 때 색소폰 동우회의 월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 때 당시 75세였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이신 분이 5월 달에 어머니께 너무 불효하여 뵐 낯이 없으시다며 뉘우치는 뜻으로 “불효자는 웁니다”를 연주 하시겠다고 했다. 연주하시며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따라 얼마나 가슴을 울렸는지 몰랐다. 저 연세에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간절함은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에 있다.    


                                                    [사랑,그리고 움직임]


오늘 두 출연자들은 마지막 부분에서 알았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직업이 엄마라고.   

 

누구에게나 엄마는 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면, 엄마가 없어진 후에 더욱 애타게 찾는다는 것이다. 같이 있을 때는 그 귀중함을 버려두고 살다가, 어느 새 그리움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도 우리 가슴으로 인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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