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새싹으로 나의 곁으로 왔던 화초들이 대낮의 정점을 지나듯이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청춘을 보내고 씨앗을 맺더니, 지금 가을의 끝자리에서 일 년을 맺을 준비를 한다. 모두 한평생을 잘 보낸 듯한데, 조금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국화이다. 얼마 남지 않는 계절에서 늦둥이 보듯 꽃을 피우고 조금 더 세상을 보고 싶은데, 입동이라는 놈이 찾아왔다. 꽃들에게 겨울은 참 길다. 낙엽 지는 11월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4월까지는 거의 잠을 자거나 혹은, 활동을 하거나 숨을 쉴 수가 없다. 기후 탓인지 옛날의 따스하던 3월은 요즈음은 눈이 내리기도하고, 아주 찬바람이 불기도 해서 새싹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적어도 3월은 지나야 얼굴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11월하고도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빼빼로 데이 근처인데, 단풍은 고사하고 바로 낙엽으로 떨어지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화는 미소 지으며 반기기도 했는데 찬바람을 몇 번 맞더니 거의 혼수상태가 되었다. 빗물의 무게에 못 이겨 가지가 찢어지고. 꽃들은 냉해를 입어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예쁘던 시절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예쁘게 꽃을 피우려고 일 년을 기다렸는데 일생의 인사도 하지 못하고 저물어 갔다. 다른 꽃에 비하여 국화의 슬픔이 진한 것은 다른 꽃들은 평생을 인지하고 떠날 때를 알고 있어, 씨앗을 맺고 세상 평을 하면서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
사람들은 피어 있는 꽃만 쳐다보길 좋아하고 시들고 멍든 꽃은 보지 않으려한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자신들에게도 시들고 뒤돌아보기 아픈 시기가 시든 꽃과 겹쳐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잘 못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꽃들은 이렇게 아프고 난 후 새싹을 피울 생각으로 극도의 아픔을 간직하면서 희망을 씨앗으로 심는다. 다음 해의 이쁜 세상을 위하여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곱씹어보기엔 너무 쓰기에 피하고 싶은 까닭일 것이다. 또한, 사람은 결점이 있었던 자신의 역사를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굳이, 아픈 것을 다시 생각해서 부끄럽기도, 껄끄럽기도 한 사실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뼛속에 심어 기억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것이 자연과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국화는, 젊었을 때 죽고 싶을 정도의 고생과 물에 젖은 솜을 지고 무거워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당나귀와 같이, 눈에 아른 거리는 역경을 다 버티고 난 후, 보이지 않는 미소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처럼, 늦게 삶의 향기를 내고 있다. 내가 고생하고 있을 때 한줄기 바람처럼 다가왔던 그 향기가 지금은 은은하다 못해 바로 코앞에서 나의 냄새를 맡고 있는 듯하다. 나처럼, 젊을 때 모진 찬바람에 시달려, 가을 햇빛에 비친 고운 얼굴은 아니지만, 내가 국화 향을 맡고 힘을 내었듯이, 지금 찢어진 가지에 매달려 있는 국화 송이도 나의 향으로 다시 일어났으면 한다. 내가 병원에서 쓰던 붕대로 국화의 가지를 여미어 매고, 고춧대를 바로 세우던 알루미늄 막대로 지지하여 더 찬 겨울이 오기 전에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가지가 찢어 지는 일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비오고 찬바람이 불면 그 어느 누구도 결과를 예지하기는 싫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런 한파가 몰려 올 땐 분명히 상처가나고, 심하게 몸이 부셔 질 줄 생각은 했었지만, 그 결과는 생각하기 싫었고, 다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왔다. 이런 한파가 왜 나에게만 오느냐고.
그 때 집의 테라스에 피어 있는 꽃들을 생각했다. 키다리 접시 꽃, 색깔을 바꾸어 가면서 응원하던 란타나, 장미, 시계꽃, 마가렛, 아네모네, 루피너스가 주인이 빨리 돌아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늦게도 삶은 너무 앞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때, 이미 가지 찢어진 국화처럼, 바람에 꺾어진 접시꽃처럼, 허망함이 안개처럼 드리워졌다.
나는 쓰러지기 전까지는 색소폰을 연주하기를 좋아 했다. 색소폰은 배우게 된 동기도, 너무 힘들고 답답힌 학교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고육지책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두 가지의 곡은 꼭 악보 없이 불러 보고 싶어서였다. 한곡은 “목포의 눈물” 이었고, 다른 한 곡은 “못 다핀 꽃 한 송이” 였다. 정말 집중하여 연습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연구의 스트레스는 무게로 다가 왔지만, 색소폰의 연습은 잘 숙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숨통이 트였다.
이난영의 한을 그린 것, 내가 이른 나이, 5살 때, 모내기하면 못 줄 뒤에서 못 단을 옮겨 주면서, 모를 심는 동네 아줌마들이 정자(피로를 잊고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모를 심으며 부르는 노래)를 하는데, 그 때 처음으로 배운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고, 목포는 내가 교수가 되고 목포에서 학회를 할 때(1996년), 처음으로 목포에 갔었는데 삼학도가 중장비로 둘러 싸여있고, 삼학도의 파도는 간곳이 없어 엄청 실망한 적이 있다.
그리고, 새 학기 마다 학생들이 MT가면 같이 가서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비롯하여 팝송 등으로, 학생들이 잘 모르는 노래도 있을까봐, 빔 프로젝트로 악보를 쏘아가며 한 시간 정도 색소폰 연주로 학생들과 더불어 신나게 논 적이 있다.
그래, 내 인생에 있어서도 못다 핀 한 송이 꽃을 피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꽃잎 한닢 남을 때까지 삶을 추구해야 겠다는 다시금 모진 생각을 하게 된다.
입동이 와서 국화의 가지를 찢고 꽃이 냉해에 괴로워도, 지금은 하얀색의 꽃에서 연분홍으로 물들어 웃고 있는 모습이 그냥 좋다. 입동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 냉해 속에 핀 국화 ]
더 할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