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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Feb 04. 2024

靑春-바람 부는 날 둥지 트는 새

성숙해간다는 것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며, 어느 듯 성장된 것을 알고는 이것이 나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장과 성숙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 며칠 못 본 사이에 아주 많이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숙은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 같다. 성장은 외적인 부분으로 인지한다면 성숙은 어느 정도 내적인 성장, 마음이 정할 수 있는 량이 아닐까한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할 수 있으나,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성장과 성숙의 공통점은  나름대로의 peak time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더 성장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그 성장의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성숙함은 어느 정도 성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때와 지금과 같이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서 성숙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성숙의 한계란, 성숙은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는 것과 같이 마음은 쓸수록 그렇게 향상되어 진다는 것이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표에 대하여 심적으로 모을 수 있는 마음의 량을 말한다. 마음은 갈바람과 같아서 한쪽으로만 불지 않는다.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흐름의 방향이 바뀔 수 있고, 그 바람에 마음을 실어 보내면 어딘가에서 받아들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화를 자주 내는 마음을 바람에 실어 보내면 어디서엔가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커다란 화를 불러오는 일들이 누구에게는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바람이 될 수도 있다.     

벌써 새로운 해가 넘어 선지도, 언젠가는 가지 말라고 애타게 잡기도, 기다리기도 했던 세월이, 태양이 잔잔한 파도 위로 걸어와 지난해에는 무엇을 했냐고 묻기도 한다. 그래서 지난해보다 성숙해졌다고 말 할 수 있음 좋겠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태양의 품속에서 다들 이루어진 바가 다를 수 있고 못 미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해가 오면,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하는 것보다도 일 년 동안 태양과 교감하면서 마음을 열어볼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해가 바뀌면 이전에 못했던 일들을 챙겨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1년 동안의 자신이 수행한 평점을 챙겨보며 아쉬웠던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일, 조금만 더 했으면 훨씬 더 성숙했을 것 같은 일들이 많음을 챙기며 그래도 잘 살았다 하는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양의 발을 밟으며 아팠던 것에 대해서도 옹알이를 해보고 나에겐 정말 능력이 없는 걸까에 대해서도 맞장을 떠볼 수 있는 일이다.   

  

지난해 텅 빈 테라스에 새싹이 아주 귀엽게 얼굴을 내밀더니, 차츰 푸름으로 더해가는 식물을 보아왔고 봄의 절정인 5월에는 덩굴장미가 피기 시작하더니 너무도 많은 수의 장미가 내 머리위로 쏟아져 저게 장미꽃인가, 태양의 조각인가, 역광으로 보이는 꽃잎들이 모두 자신감에 넘쳐 있어 청춘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접시꽃도 자신이 이 테라스에서 왕이 된 것처럼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그 키도 덩굴장미와 얼추 가까이 가면서 작은 접시꽃을 만들어 내니 누가 자신의 청춘을 빼앗을까 겁내는 모습이다. 웅크리고 있던 란타나 또한 자신이 난세의 여왕으로 빼어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 태어나면 한번쯤은 자신이 꽃이 되어 세상을 빛내어보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은 한 번에 꽃을 피우지 못할지라도 그 원인을 자신이 파악할 줄 안다. 그래서 올해에 어려우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있다. 어쩌면 아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지나고 보면 내가 너무 자신을 몰랐다는 생각도 하고 좀 더 면역 증강을 위하여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기도 한다.     


특히, 국화는 겨울 앞에서 짧은 시간에 자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어야함에 바쁘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자신을 달굴 수 있다는 것이 청춘의 멋이 아닐까한다. 이제 정원도 낙엽송은 옷을 벗었다. 부끄럽기도 하겠지만 누군들 가진 뼈대가 없겠는가. 무성했던 잎들이 생명을 위해 윤회에 들어가고 곰곰이 지나온 1년을 쳐다본다. 특히 올해의 정원에는 멀리서 구해다 심은 오죽 10그루가 서로 경쟁하듯 꽃을 피웠다.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대나무 꽃이 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몹시 걱정하기도 하였다. 새삼 대나무 꽃은 보리나 벼이삭 꽃과 비슷하고 향은 없다. 그리고 일생에 한번 꽃을 피우는데 꽃이 피고나면 대나무 자체는 말라서 죽는 단다. 그러니까 50-120년에 한번 피는 꽃이 될 것이다. 우리 집에 온지는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꽃을 피워, 죽을 것이 애처로워 꽃이 피는 가지는 모두 잘라버렸다. 이 일이 오히려 역효과 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실제로 원래의 대나무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고 시들어 갔고, 새로운 아주 가는 댓잎이 제주조릿대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도 주인의 잘못도 아주 클 듯하다. 대나무를 심고 봄이 되니 죽순이 쉼 없이 올라와 금방 큰 개체가 되고 밀도가 엄청 높아지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일생에 한번만 꽃을 피우다니 참으로 대쪽 같은 선비 같기도 하다. 그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며 갔다. 자연이 하는 일에 어찌 인간이 무슨 말로 대답하리오. 그저 그렇게 1년을 마감하는 삶들이 참으로 다양한데 그래도 사람은 사람답게 몇 번이라도 꽃을 피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런가.     


누구에게나 청춘은 오는데 청춘일 줄 알면서도 남의 청춘같이 생각하거나 좀 더 머무를 수 있는 청춘을 기대하기도 할 것이다.

청춘, 그 자체는 어느 곳, 어는 누구와 비교 할 바 아니다. 자신의 보석이다. 내놓고 도둑맞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보석은 남이 가지고 있는 보석보다 관리가 어렵다. 나에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내가 잡으려면 핫바지 품으로 방귀 새듯 사라진다. 그래서 청춘은 아쉬운 것이고 머물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춘이 간다는 것은  대나무의 꽃과 같다.     


청춘은 그 누구도 피해가길 원하지 않는다. 밀물이 산같이 밀려 왔다가 사그라지는 이치와 같이 밀려온 산을 넘지 않고는 인생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모든 생명은 삶의 정점을 찍은 후 내려가기 때문이다. 꼭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정점에 그다지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 정점에 서 보기를 기대하지만 너무 짧은 정점은 누구에게나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살다가보면 여러 개의 정점을 거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고비를 넘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들고 이 정점이 앞에서 겪은 정점보다 높은지 낮은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다. 결국 살면서 여러 고비의 정점을 찍을 수 있지만 아마도 가장 높은 효율이 청춘이 아닐까 한다. 청춘은 나의 삶을 치고 나가면서 아주 젊은 에너지로 좋은 정점을 찍을 수 있다. 같은 의미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였을 때는 내려가는 것을 준비해야 하고 최하의 정점을 찍었을 때는 세상이 마지막인 것 같아도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치고 올라 갈 수 있다. 이것이 청춘의 묘미이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서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나빠 질 것이 없다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 최악의 상태에서 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청춘이 할 일이 아니다. 나무가 폭서에, 폭풍에 잎이 찢어지고 넘어져도 청춘의 뿌리는 살아있음을, 새로운 살이 돋아나듯 새 삶을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된다. 그래서 청춘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 무엇이랑 바꿀 수 었는 삶의 최고의 재산이 된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Life is always moving”, 육체가 움직이든, 마음이 움직이든, 생각이 움직이든, 움직이면 그에 대한 결과가 삶의 맛을 돋군다. 사랑하는 사람이 출근할 때 넥타이를 가져다 매어주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마움의 표시도, 은혜의 표시도 모두 움직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마음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옛말에 “마음 장골 핫바지 똥 싼다”는 말도 있다. 마음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면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청춘은 사람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열량보존의 법칙을 벗어나는 강력한 엔진이다. 또한 청춘은 생성된 에너지를 마음껏 불출하며 하고자하는 일에 쏟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청춘은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있는 자리가 아니다. 식물들도 더욱 태양을 바라보면서 푸르러지기를 노력하고, 이시기에는 하루하루가 성숙하는 것을 눈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열심히 구동하는 엔진에 맞추어 스스로 성숙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모두 청춘을 누린다. 청춘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리는 기간이 아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이에 복종하며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이다. 생각대로 잘되지 않을 수 있으나, 청춘에서는 이를 경험이라 새기며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는 지혜로 사용한다. 무슨 일에 실패를 해도 아름다운 것이 청춘이다. 무엇이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시기가 아니다. 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 칠 때에도 둥지를 트는 새가 있다. 조금 지어 놓으면 폭풍이 휘감아가고, 또 같을 일을 되풀이해도 그 새는 바람 부는 날 둥지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일임을 인지한다. 바람이 불지 않고 아주 맑은 날은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갈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꼭 이 새와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청춘이고 피가 끓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람 부는날 둥지 트는 새]


청춘은 인생에서 해가지지 않는 계절이다. 이시기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좋고, 며칠을 뛰어 놀아도 피곤한줄 모를 뿐이다. 폭풍우 속에서도 배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고 항해를 지키는 일과 같다. 청춘은 앞뒤 생각 않고 자기의 생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폭풍속의 배를 지키려면 어떠한 충고도 필요 없고 자신의 판단대로 배를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청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청춘은 그 결과로 탓할 필요가 없다. 자신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발휘함으로써 더 더욱 자신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청춘은 누구에게도 찾아가지는 않는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 짧기도 한 인생 시간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음을 청춘은 우리에게 항상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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