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철학)
사는 법칙에 따라 사람은 봄에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눈이 잘 트도록 기도하며 하루를 산다. 지금은 씨앗이 딱딱한 껍질을 자신의 힘으로 녹여 내고 생긋 웃더니 걸음마 하는 손주를 닮았다.
땅속에서도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명을 받아 지상에 싹을 틔우는 새싹들은 그나마 활개를 치며 세상 구경을 하고, 아주 잘 자라서 이쁜 꽃을 피워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원에는 대지의 여신의 명을 받지 못하여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싹들도 있다. 작년에 너무도 많은 꽃을 피운 접시꽃이 많은 씨앗을 땅으로 내보내고도 겨울 동안 그렇게 애태우며 기다려도 올해는 싹을 하나도 틔우지 못해 안타까움이 더해가고 있다. 또 수국이 있다. 이 아이도 작년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긴 시간 동안 나의 주변에서 살갑게 지낸 꽃이다. 올해는 숨쉬는 것조차도 어려운 것같이 조금 싹을 보이더니, 더 이상 심장을 돌릴 힘이 없나 보다. 더구나 옆의 작약의 힘에 눌렸는지 아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어디에든지 적용되는 것이라는 걸 실제로 보고 있다.
그러게, 싹들도 겨울 동안 지하에서 ‘어이쌰 어이쌰’ 운동을 하고 힘을 모아 다른 싹들이 눈을 틔우기 전에 먼저 싹을 내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실제로 작년에 싸움에 밀려 눈조차 뜨지 못한 토단풍이 올해는 일찌감치 찬 겨울에도 싹을 내더니만 다른 싹들보다 힘차게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수선화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 올해 무언가 맥문동 같은 잎이 땅을 밀고 올라오길래 그 원천이 무엇인가 도저히 머리에서 싹을 찾을 수 없어 이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솟아 나와 시간이 흐른 뒤에 수선화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에도 없는 싹이어서 곰곰이 생각을 짜보니, 작년도 아니고 재작년 늦은 가을에 덩이뿌리를 몇 개 심은 것이 생각이 났다. 거의 2년 동안 데메테르의 시중 노릇을 한 것인데, 지구상에 빛을 보다니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정호승 시인은 나보다 훨씬 먼저 "외로울 때는 외롭다고 말해라 그리울때는 그립다고 말해라 그러므로 너는 너를 잃지마라 수선화처럼 피어라"라고 노래한 것이었다. 거듭 느끼는 거니와 땅속에도 엄연히 지켜야 할 질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곁에서 보는 사람의 눈으로써는 꽃은 피면 되고, 사람은 아름다움을 느끼면 된다는 피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나, 땅속에서, 새싹에서 꽃이 필 때까지의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단편적인 상식은 피어난 꽃에 대하여 예의가 아닐 것이라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오월 장미}
무슨 생명이든 차고도, 악한 겨울과 그 세찬 바람 앞에 서 있는 생명을 보면 용기를 북돋워 주기보다는 짠 눈물이 난다. 꼭 밖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식들의 생각과 헤쳐 나가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아이들이 악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래도 한 가지 억지스런 생각으로는 ‘겨울을 견디고 나서야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꼰대적 발상으로 위로를 삼으려 한다.
대부분 생명은 자손을 만들기 위하여 꽃을 피운다. 자손은 만든다는 것은 위기가 도래했다는 말이 된다. 정반대로 사람들은 그 대상이 피우는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꽃들이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꽃을 피울까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냥 꽃이 피니까 좋은 것이고, 향기가 다가오고, 누구라도 꽃을 좋아한다는 감정만 가지고 있다.
그러면 왜, 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봄’에 위기를 맞는 걸까?
내가 나무가 아니고, 꽃도 아니기에 과학적 상식으로 접근해 볼 수밖에 없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봄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차디찬 악조건에서 거센 스트레스를 받다가 따스한 봄이 되면 빠른 시간 내에 싹을 틔우고, 자라서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워야 하는데 시간의 절박함이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도 언제 싹이 나서 저렇게 자랐지하는 생각을 한다. 나도 조금 전까지 덩굴장미의 ‘눈이 보였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었는데, 3월, 4월을 거치면서 청춘에 도달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러니까 겨울 동안에 축적한 에너지를 최대한 발휘하여야 청춘에 도달한다. 시간적으로 엄청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름의 뙤약볕이나 청년기가 되면 서로 지독한 경쟁을 해야 하고,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씨앗을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동작이 더딘 꽃들은 잎을 만들지도 못하고, 급해서 꽃부터 먼저 틔우는 놈들도 많다. 더구나 꽃샘추위 기간에는 ‘지금 태어난 게 실수인가’하는 혼란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더 서두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빨리 자손을 남기기 위하여 꽃을 피워야겠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꽃들이 겪는 아픔을 마음속에 넣어두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꽃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예쁘고 사랑스런 꽃들도 그 내면에는 엄청 고통의 결과인 것을 알아주어야 한다.
장미는 왜 봄에 피는 걸까?
[장미의 생각][
그냥 보아도 정신을 잃게 하는 그 고고함과 한번 슬쩍 웃어주면 몽환 속에 정신을 잃게 하고, 그 빛깔 한 번 보면 내 몸속의 피가 끓어, 저렇게 빨간빛으로 감탄 시켜놓고, 속에서 밖으로 한겹 한겹 겹쳐진 꽃송이를 보면 여태껏 쌓아온 나의 역사가 거기에 들어 있고, 어쩌다 살랑바람에 몸을 움직이면 꼭 나에게 안기려는 몸짓 같기도 하고, 역광으로 비쳐진 꽃을 보면 어쩜 그렇게 내 마음 한구석에 끼어있는 풀지 못한 한이 뭉친 덩이 같고, 막 꽃을 피울 듯 혀만 뾰족이 내고 있는 봉오리를 보면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와 아가에게 건네는 모습 같고, 석양에 축 늘어진 모습을 보면 언젠가 내가 저렇게도 힘없이 길거리를 타박거린 생각도 나고, 한밤에 보는 장미는 또, 저렇게나 외로워 보일꼬!
한 겨울 내내 창밖에서 검은 메마름으로 가지조차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뼈대의 우짖는 소리가 침대 속 나의 뼈대에까지 스며들어 내 마음을 울게 하였던 줄기가, 봄이 오는가 조심스레 눈을 뜨더니,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용기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장미도 ‘내가 왜 꽃을 피워야 할까’하는 생각도 해볼 것이다.
당장은 싹도 키워야 하고 봉오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나, 오늘이 지나고 꽃이 떨어지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아 꽃을 피워햐 할까’하는 질문을 철학 교수님 수업 시간에 받았을 것 같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뭣 땜에 살어?’라는 질문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전에, 아름다운 두 여신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큰일을 저질러 놓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저질러 놓았다라고 말하지만, 저기, 아주 먼 하늘에서는 아주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신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아프로디테는 그 어느 누구의 생각으로도 이 예쁜 신의 위치를 쳐다보지도 고개도 들지 못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의 신인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도 너무 예뻐서 하데스가 납치하여 아내로 맞았을 만큼 어여쁜 신이다.
또, 아프로디테는 고대 키프로스 왕의 딸인 스미르나가 자신을 숭배하지 않았다고 분노하여 스미르나에게 저주를 내려 자신의 아버지와 근친 상간하도록 하여 임신하게 되고, 신들은 그녀를 몰약나무로 변하게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나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아도니스(Adonis)이다. 몰약나무(Commiphora myrrha,Myrrh)는 아주 떫은 성분인 탄닌(폴리페놀)으로 향기도 가지고 있다. Myrrh는 슬픔, 또는 쓴맛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슬픔, 속죄, 영적인 희생, 고통 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움의 뿌리를 상징한다.
아도니스는 인간이지만, 그 외모는 신들조차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이었고,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보자마자 한눈에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보호하려고 몰래 상자에 넣어 지하의 여신인 페르세포네에게 맡기게 된다. 페르세포네도 또한 아도니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아프로디테에게 돌려주지 않게 된다.
한 인간을 두고 두 여신이 다투게 되자,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개입하여 아도니스는 1년 중 1/3은 아프로디테와, 1/3은 페르세포네와 보내고, 나머지 1/3은 아도니스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절충했다. 아도니스는 자유로운 1/3의 시간마저도 아프로디테와 보냈다.
아도니스가 사냥 도중에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되는데, 전해지는 다른 버전은 아레스(아프로디테의 연인, 전쟁의 신)가 멧돼지로 변하여 죽였다는 설도 있다. 결국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프로디테는 무시무시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곁눈으로 알 수 있다.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에서 아네모네가 피어났고, 또한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가시에 찔려 피를 흘렸는데, 그 피가 땅에 떨어져 장미꽃으로 피어났다. 붉은 장미는 사랑과 고통, 열정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고, 또 다른 버전은 아프로디테의 눈물이 장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진다. 결국은 장미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이 피워낸 꽃이며, 아름다움, 욕망과 고통(육체적, 피), 그리고 슬픔, 애절함(정신적, 눈물)의 뜻을 품어 전해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장미의 시조는 아프로디테였으나, 그 씨앗은 아도니스가 되는 셈이다. 일단 장미는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의 엄마이고, 데메테르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를 찾아 나선 엄마의 노력을 보면 그 얼마나 처절했으며, 그 고함소리가 온 세상을 흔들었다. 제우스의 도움으로 페르세포네를 찾아 돌아오려고 했으나, 페르세포네는 지하의 열매인 석류를 하나 먹어버려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페르세포네는 엄마의 속박에 벗어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석류를 먹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그 품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옇든, 장미는 뿌리 내릴 땅이 필요했고, 페르세포네가 엄마에게 당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페르세포네의 고집으로 절반은 하데스와 땅속(겨울)에서 살고 절반(식물이 자라는 시기)은 엄마와 대지 위에서 살기로 했으니깐, 그 정도의 허락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다음은 장미가 자라나야 할 명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것은 아프로디테의 염원이 될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 하나 살려내는 일이 신에게 무슨 그리 큰일이 될 것인가. 헤라클레스도 인간에서 신으로 만들었는데, 아프로디테의 욕망과 그 염원으로 충분히 살려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어쩌면 죽음(지하)가 싫어서, 자유스런 1/3의 기간도 아프로디테와 같이 있었던 일들이 아프로디테의 가슴 깊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혹시나 또 다른 신에게 맡겼다가 또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봐, 스스로에게 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도니스의 혼은 부름을 받아 줄기를 만들고 성장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전에 억지로라도 1/3의 기간을 페르세포네와 같이 지하의 땅에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현실에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하의 생활이 끝나고, 아프로디테를 만날 때는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생명의 순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도니스 입장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사랑도, 페르세포네의 사랑도 다 받았다는 사실은 벌써 자연에 대한 공부를 끝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페르세포네의 눈물]
장미는 왜 봄에 꽃을 피울 수밖에 없었을까?
또, 아도니스가 죽을까 봐 아주 심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씨앗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한창 잘 자라고 있는데, 또 겨울이 온 느낌이 든다. 꽃샘추위가 몰아쳐 오는 것이다. 벌써 또 지하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뭔가 마음이 급해지고, 빨리 싸앗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불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모자란다. 또, 다시 대지의 여신에게 부탁하고 싶으나, 대상은 신이어서 말을 전할 방법이 없다. 아프로디테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씨앗을 만들자는 시스템을 가동할 수 밖에 없게 되어 간다.
그래서 장미는 왜 사는 가에 대한 해답은 사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고.
그래도 장미는 그렇게 짧은 기간에도 충분히 사람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와 있다.
사람은 바쁘다고 입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이, 장미는 그 시간 동안 사랑의 의미와 희생, 다시 다가올 희망, 상대에 대한 존중과 신뢰, 아쉬움 등을 꽃잎에 새겨 ‘왜 꽃을 피워야 하나’에 대한 결론을 사람같이 맺고 있다.
[아도니스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