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고 35기 동기 산행)
[항공모함 승무원: 김상훈, 허영돈,정경수, 김기영, 임진삼, 황남철, 이병억, 정인만]
세월이라 하면, 가장 먼저 아쉬움이란 말이 떠오를 것 같다. 어쩌면 삶의 천적과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특히나 저녁노을과 같은, 혹은 여물지 못한 황혼이 다가서면 나의 세월을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아주 늦지는 않은 시기에 주위를 한번 둘러보면, 처음으로 머리를 빡빡 깎고 모자를 쓴 중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이 은상 님의 “가고파”처럼,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 고 보고파라 보고파’.
외딴곳에서 올해보다 더 큰 수해를 겪어 집, 짐승 등 모든 것을 다 떠내려 보내고 큰 동네로 이사가 처음으로 전깃불을 구경하고, 같은 해에 마산중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운 좋게 들어갔다.
큰 바다가 있었고, 연기 나는 커다란 굴뚝이 있었고, 처음 만난 친구들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에~또”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말소리도 가르치는 것도 모두 나의 상상 위에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통학 기차 타러 가는 길에 형, 누나들과 알게 되고 관계가 쌓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달라지고, 눈이 트게 되어갔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적응을 잘하였고, 점심시간의 도시락에서 정이 더 깊어 지는 것을 느꼈다. 2, 3학년 때에는 양 영도 수학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전번의 수학 시험보다 점수가 떨어진 것만큼 종아리를 맞았던 생각이 새삼스럽고, 매 맞을 당시에는 수학이 공포에 가까웠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2 때 다리 수술을 하여 결석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시골의 촌구석까지 친구 한 명과 병문안을 오셨던 기억을 한다. 내가 몸을 담고 있었지만 마산중학교는 전국에서도 알만한 학교였고, 명문 학교였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은 담 하나 건너 있는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끝이 났다. 마산중학교에서 200명 넘게 마산고에 진학한 것으로 생각한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간 것은 너무 어린 마음의 시기였기 때문에 진학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으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니 무언가 초기부터 계급이 생겨 어리둥절하게 시작하였다.
특별반 제도가 있어 무한히도 마음을 졸여가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3반, 4반의 특별반이 있었고, 시험 뒤에는 항상 그 성적을 게시판에 붙였던 기억으로, 특별반에 있으면서도 이를 지키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던 기억도 있다. 나는 촌과 도시의 생활에서 일찍이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였던 것 같다.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죽도록 공부만 했던 기억밖에 없고 많은 친구가 아니라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동기들도 나의 존재에 대해서 큰 기억이 없을 것을 생각한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의 사회적 적응은 살아남기에 치중하게 된다. 즉, 자신의 개발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게 되고, 고등학교 때와 비슷하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약대에 들어가니 내가 속했던 약학과는 30명 정원에 25명이 여학생이었고, 부끄러워 말도 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하게 자신을 다그치는 방법으로 적응해 나갔다. 초중고학생 가정 교사, 태권도 도장, 웅변 학원, 기타 학원, 사진예술연구회, 대학 내 서클인 무지개회 등에 가입하여 정신없는 훈련을 하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가능하다고 판단 되던, 3학년 때에 대학의 학보사 사진 기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는 계엄 상황이었고, 대학 내에 탱크가 진주하고, 휴교가 되었으며, 학생들은 학생의 길로 가지 못하는 시기였다.
기자증 하나로 학교를 들락거리며, 동료 학생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리고자 대학 신문을 선배 기자들과 부산일보에서 만들어 배포하였다. 신문의 절반 정도는 윤전기의 납판을 긁어버려 보이지 않게 출판되었고, 그때의 상황은 학생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그 뒤 10월 26일 부산 극장 앞에서 한 줄은 학생들이, 맞은 편에는 경찰들이 대치하다가 오후 3;00를 기하여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끝나자마자 경찰들의 낚시가 시작되고, 주위 상인들은 학생들을 보호해 주었다. 새벽에 박정희가 세상을 끝내고, 자유는 학생 및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뒤 배움의 길로 들어서서 코피가 나도록 공부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3학기를 마치고 학사장교 1기로 군대 생활을 하게 되고, 전방의 백골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한방법을 다시 찾아 나서 ‘조용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달라지게 된다. 그다음에 교수가 되기 위해, 또 한번 전신의 힘을 짜내어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과 육체를 다그쳐 깨어 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30년을 버텨 낸다.
동기들도 모두 나와 같은 전쟁에 돌입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세월을 강물 위에 띄우고 지금에 도달하였고, 각자 황금기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세월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가끔 실눈을 뜨고 옛날 친구들은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 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어쩌면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태 전에 정경수 동기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지, 카톡으로 동기들을 모으더니 많은 동기들이 모였고, 한 달에 한 번 모일 수 있는 틈이 마산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니, 대장으로 진급하고 나서 매달 마지막 주에 산행하는 참여 투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졸업 후 50년 만에, 중학교 졸업 53년 만에 진주의 진양호 둘레길을 걷는다는 투표를 진행한 경과를 보고 나도 한번 참여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전에 정 대장이 백두산 가자고 했을 때 동참한다고 먼저 연락을 했다. 사람 사는 일이 그러하듯이 출발 직전에 또 한번 삶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어 같이 가지 못한 적이 있다.
진양호는 내가 사는 여수에서 한 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고, 어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기필코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발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혹시나 빨리 온 동기가 있을까 둘러보았을 때, 사람들은 많이 보이는데, 어떤 놈이 동기 놈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감이라는 게 있어 조금 더 기다렸더니, 어렴풋한 목소리 지문이 다가온다. 맞다, 동기들이다. 그래서 동기인가보다. 몇십 년이 지나도 기억의 줄기는 세월에 녹슬지 않은 모습이다.
나를 알아보는 대장이 반갑고,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는 말을 하는 동기도, 알아보지 못한 동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을 보면, 선원이 많아 다 알 수는 없어도, 이 자리에 와 있는 승무원만으로도 저 넒은 진양호에 항공 모함이라도 띄울 수 있을 것 같다.
진주에 사는 친구들의 초대로 진양호 코스를 잡았다고 한다. 진주에 누가 사는가하고 물었더니, 정 기근, 최 병원, 안 동준이 있단다. 다른 친구는 잘 알지 못하는데 병원이는 중학교 때 내 짝지였고 여태 소식을 몰랐는데 점심시간에 온다고 한다, 그 반가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전쟁터에서 살아 되돌아온 전우 같은 저려옴이 있었다.
[중학교 짝지 : 최병원]
옛날에 대학 1학년 때 진양호를 한번 다녀간 적이 있는데, 오늘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은 저 넓고도 잔잔한 호수밖에 없다. 산으로 가는 길은 아주 친절하게도 데크로 되어 있어 그나마 어렵지 않게 산행할 수 있었다.
중학교부터 같은 반을 했던 정 경수, 김 상훈, 김 기영, 이 병억, 황 남철, 그리고 오늘 처음 본 진해에서 치과 원장을 하는 허 영돈, 우리나라 론볼의 창시자 임 진삼, 한학의 대가 경초 정 인만들을 만나, 항공 모함은 진양호를 출발하여 산으로 방향을 잡고 운항했다.
얼굴만 봐도 살아온 전투 경력이 보였고, 모두 수고했다는 말은 않지만 여기까지 와 준것에 대한 너무도 고마움이 컸다. 삶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무슨 형태의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동기들, 굳이 황홀한 석양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도 빛을 내고 있는 동기들에게, 같이 가고 있다는 기쁨에도, 큰 아픔 없이 갈 수 있겠다는 마음의 다짐도, 항공 모함보다도 큰 믿음으로 진양호에 녹아들고 있었다.
진주의 동기들이 마련한 식당 화개마을에서의 오리고기가 맛이, 멋이, 오늘같이 더운 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에 찻집에 들렀는데, 연꽃이 필 준비를 하고 있는 늪을 가진 곳이어서, 동기들을 만난 날, 연꽃의 고요함이 소리 없이 스며드는 동기들의 깊은 헤아림이 맑은 수정처럼 고왔다.
[정경수, 허영돈, 최병원, 이병억, 안동준, 황님철, 임진삼, 정인만, 김기영, 김상훈, 김종덕, 정기근]
빈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서로의 가슴에 와닿고,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한 대답도 연꽃 위에 비치는 영상같이 알알이 배겨왔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과 동기들을 만난다는 것이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람 사이에는 정이 들 시간이 필요하지만, 동기들 사이에는 그간 쌓인 정이, 이야기가 그 틈을 없애 주기 때문이라는 것도 깊이 새겨져 온다.
이제 또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흘러가는 강물 위에 이파리 하나 띄워두고 쫄랑쫄랑 뒤따라가는 재미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동기들은 사람과는 달랐다. 또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아우를 수 있는 더 큰 호수가 되었으면 한다.
고맙다.
반가웠다.
그리고
건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