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큰딸아이가 여덟 살 무렵이던 2007년 경,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에 자주 내려가던 시절에 쓴 글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첨삭했습니다.
방촌 아지매는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란 나의 죽마고우, 손용호 군의 어머니입니다.
방촌 아지매는 나의 딸 예지를 자꾸 지예라고 부른다.
나는 고향에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이다. 일 년 전에 선친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뵙기 위해서 더 자주 고향집을 찾게 되었다. 고향마을은 경남 진주시에서 한참 외진 동네 일반성면이다. 일곱 살 예지를 앞세우고 고향집 골목을 들어선다. 마을 입구에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 그늘이 고향집 지붕에 어리었다. 어머니는 이 집에서 나를 낳고 키웠다.
고향집 대문 앞에서 밭일 나가는 방촌 아지매를 만날 때가 많다.
-아이고 이기 누고? 지예 아이가?
-우리 이뿌이 많이 컸네?
하며 낫이며 호미가 든 대바구니를 내려놓고는 아이같이 천진한 웃음으로 덩치가 제법 커진 예지를 한번 보듬어 보느라 한바탕 난리가 난다. 그러면 예지는 방촌 아지매한테 보듬긴 채로
-할매, 지예가 아니고 예지!
하면서 얼른 바로잡아 보지만 방촌 아지매는 항상 ‘지예’다. 어떤 때는 예지가 발음이 어려워서 인지 순서는 그대로 두고 ‘이제’라고 부를 때도 있다. 예지도 이제는 방촌 할매가 제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바로 고쳐보려 애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
방촌 아지매는 고향 마을에서 우리 시골집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시는 분이다. 나의 모친과는 13,4년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나의 노모를 보살피는 마음이 마치 막내 동생이 큰 언니를 대하듯 하시므로 나와 아내는 방촌 아지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방촌 아지매에게는 두 아들과 딸이 하나 있는데, 큰아들 손용호(孫容鎬) 군은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지만 나와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보통의 드세고 장난 좋아하는 사내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더러는 토닥토닥 다투기도 하고, 더러는 사이가 냉랭해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손용호 군과 나는 주먹다짐은 물론이거니와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욕지거리 한마디 하지 않고 자랐다.
방촌 아지매는 아랫집 윗집으로 형제처럼 붙어 지내는 나와 당신의 아들이 아주 보기 좋은지
우리가 나이 든 지금도
-느그들끼리는 잘 지내야 한데이.. 형제처럼 지내거라..
늘 신신당부다.
한 여름, 우리 시골집은 남서향으로 약간 돌아앉아서 오후 늦도록 햇볕이 들어 무척 더웠다. 우리 집 보다 동쪽으로 돌아앉아 좀 더 시원했던 방촌 아지매 집 대청에서 어린 친구들끼리 모여 자주 놀았다. 친구들이 아무도 없을 때는 빈 대청마루에서 혼자 놀다가 까무룩 잠이 드는 수도 있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잠이 깨곤 했는데 허기를 느끼면 아무도 없는 아지매 집 찬장을 뒤져 찬밥을 꺼내 먹기도 했다.
아지매가 밭일에서 돌아오다 마침 그 모양을 보면
-어이구! 많이 묵그래이..
-밥 더 주까? 김치 더 주까?
하시며 시골집 살림에 뻔한 반찬들을 이리저리 내놓으셨다.
해거름의 한여름 밥이 달았다.
'방촌'은 방촌 아지매의 댁호(宅戶)다.
방촌 리(里)는 우리 고향마을에서 십 여 리 떨어진 이웃 동네인데 아마 그 시절 으레 그렇듯이 알고 지내던 이웃 마을 어른들끼리
-아무 날 아무 시에 우리 사돈 하기로 함세!
하여 방촌 아지매는 방촌 아제한테 시집오신 듯하다.
큰 벼슬살이를 하여 무슨무슨 대감, 무슨무슨 선비 할 일이 없었던 우리네 농촌 범부들은 아무개님하고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았나 보다.
그래서 부인이 시집왔던 친정 동네 이름을 따 그 집 택호로 삼았는데, 부인의 친정 동네 이름이 서울이면 '서울댁', 부산이면 '부산댁' 하는 식이다. 그러면 그 남편은 ‘서울 양반’, ‘부산 양반’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이반성면 가촌 마을에서 시집오셔서 ‘가촌’ 댁이다.
'지동댁'도 있었는데, 지동댁은 지가 태어난 [제 동네]에서 [제 동네]로 시집왔다고 붙여진 다소 웃기는 댁호이다. 지동댁은 같은 마을에 사는 옆집 오빠를 엄청 좋아했었던 모양으로 옆집 오빠는 그만 ‘지동 양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