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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윤 Dec 24. 2022

얼음 타러 가자.

하재윤의 회상

글쓴이 주: 다음 블로그가 종료되었습니다. 블로그에 있던 옛글 몇 편을 옮겨왔습니다. 

‘하재윤의 회상’이라는 부제로 몇 편 올려볼까 합니다.     


이번 글은 어린 시절에 '얼음 타러 가자'고 아이들을 불러내던 준호형의 호객 소리를 회상하며 쓴 글입니다.




얼음 타러 가자..

하재윤의 회상


어린 준호 형이      


-어.. 어.. 얼음 타러 가자아!     


하고 동네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는 아주 특이했다.     


겨울방학이 되면 우리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놀기에 바빠 조그만 시골마을은 늘 와글거렸다.     

겨울 놀이의 으뜸은 단연 썰매 타기였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어가 시골말에 많이 남아 있었는데 [벤토], ]쓰께또]가 대표적이다. 

벤또는 도시락이겠고, 쓰께또는 스케이트의 일본 강점기 잔재이겠으나, 나는 중학에를 가서 선생님들의 엄한 교육을 받고서야 그것이 일본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아마 시골에서 자라난 내 동기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였을 터이다.     


쓰께또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평평한 송판이나 합판 조각을 엉덩이를 받힐만한 넓이로 네모지게 마름질을 한 뒤, 양쪽 가장자리에 곧고 야무진 받침대를 서로 평행하게 댄다. 다시 받침대 밑에 철사를 곧게 펴서 앞뒤로 잘 고정하여 달아 만들었다.     


양 가장자리에 단 받침대의 평행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평행이 맞지 않으면 송곳으로 얼음을 지칠 때 받침대 밑의 철사와 얼음 표면과의 마찰이 심해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또 받침대 밑에 단 철사가 혹여 휘어지지 않았는지? 우리는 늘 살피고 손질하였는데, 이것은 쓰께또를 타는 우리들이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매너였다.     


얼음을 지칠 때 쓰는 송곳은 대가리를 잘라낸 못을 불에 달구어 나무 막대기에 거꾸로 박은 것을 썼는데 못 대가리를 자르는 일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아주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펜치에 못대가리를 끼워 꽉 물리고 기차가 다니는 레일처럼 생긴 쇠 받침대 위에 대고 펜치 머리를 망치로 꽝 꽝 몇 번씩 내리치면 못대가리가 뚝 잘려나갔다. 꽝 꽝 내리칠 때마다 작은 손이 쩡쩡 울려서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 썰매는 자기가 잘도 만들어 타고 다녔다.     


-어..어.. 얼음 타러 가자아     

준호 형은 유독 썰매 타기를 좋아했다.     


준호 형이 동네 어귀 포구나무 밑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는 우리 집 대청을 지나 홑창호지를 바른 방문살 사이로 추운 겨울바람과 함께 포르르 잘도 들어왔다.     


-어.. 어.. 얼음 타러 가자아~     


어린 나는 준호 형의 호객소리에 히히.. 웃음이 났다. 준호 형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꼭 ‘어’ 발음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독 좋아하는 얼음을 지치러 함께 가줄 것을 청하는 대목에 ‘어’ 자(字) 발음이 있을게 뭐람?      


그래서 준호형의 얼음은 항상 [어.. 어.. 얼음!] 일 수밖에 없었다.     


-히히.. [어.. 어.. 얼음!]..     


나는 준호형의 ‘어.. 어.. 얼음 타러 가자아’를 따라면서 하면서 토깽이 모양으로 쓰께또를 들고 밖으로 내달렸다.     


-준호 엉가.. 나도 [어.. 어.. 얼음!] 타러 갈란다..     

어린 준호 형은 무진 반가워했다.     


금세 아이들이 한 무더기 모이면 마을 앞개울은 시끌벅적해졌다.      

곧이어 

물에 빠지는 놈..

이미 빠진 지 오래되어 젖은 양말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놈..

군데군데 얼음을 두드려 친구를 빠뜨리고자 애쓰는 놈..

감춰 온 성냥으로 불을 지펴 놓는 놈..     

이때쯤이면 우는 놈도 나온다. 너무 불 가까이 다가가 불구멍이 나버린 양말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놈들이 그랬다.     


아이들은 제각기 시끌벅적 대고 작은 개울은 우리 어린 동기들에게 한없이 넓었다.     


그런데

한 겨울 내도록 나는 준호형의 [어.. 어.. 얼음! 타러 가자]를 버릇 삼아 해대곤 하다가 아주 불행한 일을 당해야만 했다.     


오호 이런. 아뿔싸.


겨울 방학이 끝나고 봄이 왔을 무렵, 나는 준호 형을 따라 말더듬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 5학년 내내 아주 극심한 말더듬이 신세로 지내다 육 학년에 올라서 담임선생님의 [큰소리로 책 읽기] 숙제를 근 일 년 가까이하고서야 말더듬이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울 사는 준호 형이 명절에 시골에 내려왔을 때 유심히 들어보면 [어!] 자(字) 발음이 아주 조금 약한 것을 지금도 느낀다.     


-히히.. 어.. 어.. 얼음! 타러 가자아~     


2007년 7월 4일 수요일 오래된나무 하재윤 배상     




2022년 12월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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