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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 Oct 29. 2023

2-9. 왜 불안으로 고통받을까?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날이 있다.

사소한 일에 종일 끄들리고 시달리는 날 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고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나를 괴롭히는 일 말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벤조(신경안정제)를 베어먹고 의식의 흐름을 틀어도 기어이 원치 않는 쪽으로 기어가는 그런 엿 같은 날 말이다.


퇴근 무렵이었다.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여미는데 모니터에 딱하니 떠 있는 인사 발령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그리하듯 눈에 담아두지 말고 그냥 모른 채 지나쳤으면 좋았을 일을 굳이 손을 뻗어 일을 만들고 말았다. 언제나 이때가 되면 호기심과 무의식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회사 의자에서 궁뎅이를 떼는 순간, 일과 관련된 어떤 것도 머릿속에 담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종일 나를 짓눌렀던 기분 나쁜 불편함은 흩어지지 않는 장막이 되어 계속 내 곁에 머물렀다. 그래서 쉬어도 쉴 수가 없고 잠을 자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까닥…,


검지 손가락 놀림 한 번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떠올랐다. 망각의 혼연 속에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생경한 이름을 마주하자, 잊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얌생이처럼 간사한 간재미 눈을 하고 온갖 잔머리를 쓰던 비굴함과 막무가내로 우기던 그 뻔뻔함, 그리고 밥벌이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해 이 더러운 인간관계를 끊어낼 수 없어 온몸이 갈려 나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또다시 헤어날 수 없는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자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의 파고가 내 안으로 치밀고 들어왔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밀어내도 지난 기억의 잔상은 쉽사리 나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긴 시간 동안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허우적댔다.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뭔 일인가 싶어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일단 내키는 대로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음박질치다 터질듯한 심장에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사이렌 소리는 왱왱거리는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나처럼 뛰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저 서로 웃고 떠들며 잔잔하게 평온한 채로 있을 뿐이다. 그들에겐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에 가로막혀 다른 세상을 사는 듯, 광적으로 울려대는 저 소리는 오직 나에게만 들릴 뿐이다. 오로지 내 안에서만 메아리치며 가슴을 찢고 마음의 평안을 부순다.


왜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가? 아니 왜 다른 사람에게는 울리지 않는가? 모두 같은 상황, 같은 시간대에 있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든 살고자 미친 듯이 뛰는데, 왜 어떤 이에게는 작은 울림조차 되지 않는가? 나에게는 먹고 자고 쉬는 것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이 왜 타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되는가? 도대체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계에는 평균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종형을 보이는 ‘정규 분포’라는 현상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인구 통계학에서 사람의 키나 체중이 정규 분포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남성의 키를 그래프로 그리면 한쪽 끝에 키 큰 사람의 그룹이 있고 반대편엔 키 작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중간 키인 사람들이 대규모로 분포한다. 즉 키의 분포는 평균 주변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사람 수가 줄어들며 종 모양의 곡선을 만든다.

[출처: 위대한 수업 - EBS]


불안도 마찬가지이다. 앞선 사람의 키를 불안으로 치환하면 선천적으로 불안에 둔감한 사람이 있는 반면 작은 일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정신적 반응은 개인이 가진 불안 민감도에 따라 달라지며, 정규 분포의 오른쪽에 치우쳐져 있을수록 불안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 ‘병적 불안’이 된다. 이는 정규 분포 원리상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불안 장애의 평생 유병률 (전체 평균 10%, 남성 6.7%, 여성 11.7%)과도 관계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남들보다 더 쉽게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자연계의 선택을 받은 극소수의 선민이다. 내가 가진 극한의 불안 민감도는 뇌 안의 경보 체계를 오작동시켜 잦은 오류를 일으킨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오작동을 멈추거나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없다는 데 있다. 사이렌이 오경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끌 수가 없다. 한번 잘못된 트리거가 당겨지면 스스로 뭉개져 사라질 때까지 통제할 수 없는 반복된 허상에 시달렸다. 분명 잘못된 오류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결국 깊은 우울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나을 수 없다는 말인가? 원래 이렇게 태어났으니 이대로 살라는 말인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 고통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 말하는가? 이것처럼 잔인한 말이 또 어디에 있는가? 불안의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마다 이렇게 생긴 내가 너무 싫어 분노의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이렇게 엿같이 생겨 먹은 네 탓이다.”


정말 밉고 싫었다.

한시라도 편한 날 없는 나 스스로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래서 지난날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증오하며 살았다. 하지만 정규 분포의 오른쪽 맨 끝단에 위치한 사람이 된 것은 필시 내 선택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극한의 불안감을 투쟁과 싸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치열하게 견뎌준 자신을 보듬고 응원할 일이다. 사소한 일로 불안이 몰려와 며칠을 끌려다니는 나를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금방도 왔구나”


“너는 쉬는 날도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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