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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 Apr 21. 2024

2-11. F 코드는 중요한 게 아니다.

<불안으로 고통받는 당신에게>

빛바랜 무명 봉투를 들고 나올 때마다 무슨 약인지 궁금했다.


원내 처방이기에 약에 대해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치료자(정신과 전문의)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엔 그랬다. 그게 뭔 대수라고 어떤 약을 먹는지 알면 정말 아픈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슨 약인지 알기 위해 참 많은 헛짓거리를 했다.


F328


F410


하얀 여백에 두 줄로 선명히 적혀 있는 나의 진단명이다. 이게 뭐라고 그냥 질병분류코드 일 뿐인데 진단서의 F 코드를 보면 가슴이 쩌릿하며 뻑뻑해진다.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처럼 조급함이 몰려오며 그 뜻을 알아차리려 애를 쓴다. 반드시 풀어야 할 암호인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며 나와 숫자만 존재하는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떤 날은 잠들기가 힘들었다.

또 다른 날은 둑이 무너지듯 식은땀을 흘리며 온 이불을 적시고 끈적거리는 축축함에 언짢은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흔들리며, 술렁거리는 마음에 몸도 같이 움직였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진단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다르게 오늘 하루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F328이 비정형 우울증이고 F410이 공황장애라고 해서 아침, 저녁으로 하루 2번 먹는 렉사프로, 에스벤서방정, 쿠에타핀 등이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여 항우울, 항불안 효과를 나타내는 약이란 걸 안다고 해서 나의 하루가 편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슨 약을 먹는지, 진단서에 적힌 병명이 뭔지에 얽매여 오늘을 잊고 순간을 놓치며 살았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병과 그에 수반된 신체화 증상, 먹고 있는 약의 효능을 이해하는 것은 치료의 첫걸음이 된다. 진정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약인지 알고, 진단명이 무엇인지 아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너무 매몰되거나 과몰입하여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약과 병명에 대해 아는 것보다 잠은 잘 자는지, 식욕에 변화는 없는지, 오늘 내 감정은 어땠는지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병이기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감정의 흐름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갑작스러운 무기력의 유혹이 부상하거나 기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무너진다면, 반드시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 이럴 때 내가 비정형 우울증, F328의 가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찰나에 집중하라.

식욕이 사라지면 먹는 것에만 온 신경을 써라. 막연한 불안감이 올라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당신이 편해지는 방법을 찾아라. 자살의 충동이 올라올 땐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도적으로 꺾어라. 약으로 자살하려 했다면 온 집안을 뒤져 가지고 있는 약을 다 버리고, 운전 중 자살의 충동이 올라온다면 시동을 꺼라. 이렇게 실행할 의지를 꺾어라. 그리고 이때의 감정을 글로 남겨 차곡차곡 쟁여라. 시간이 지나 급성기가 지나고 마음이 추슬러졌을 때 노트를 펴고 그때 왜 이런 감정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라. 잘 모르겠거나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나와 당신이 하고 있는 이 일은 정해진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마음이 건넨 대화의 끈을 찾는 일이다. 몇 번 그 끈을 놓친다 해도 마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조급해하거나 실망하지 말라.


나를 알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은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에 집중하며 내 감정을 살피고 스스로를 돌봐라.


이것이 어떤 F 코드를 받았는지 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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