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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 Jun 16. 2024

2-12. 정신과약 해외 반입

<불안으로 고통받는 당신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당장 필요한 만큼만 들고 간 뒤 가족 또는 지인을 통해 국제우편으로 받으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리 처방은 불가능했고 설령 환자의 편의를 봐준다 해도 향정신성의약품을 우편으로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드시 진단서와 처방전을 동봉해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세관을 통과할 수 있을지,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들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출국일이 일 년 정도 남았을 때,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약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원에 갈 때마다 한 달 분량의 약을 받아 2년 반 치를 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을 때, 불현듯 “이 많은 약을 들고 세관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약 13개월 그리고 신경안정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만 같았다.

이젠 8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려 쉽게 끊을 수도, 떼어놓을 수도 없는 약을 모으는 데만 급급했지 어떻게 들고 갈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수북이 쌓인 약을 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허망했다. 혹시 “현지에서 구할 수 있을까” 싶어 구글에서 ‘Psychiatry Clinic’을 검색해 봤다. 하지만 현지 정신과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고 어렵게 찾은 병원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약을 구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완전한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또 한 번 내 병이 무겁게 다가왔다.


인생을 살다 보면 굳이 겪지 않아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마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만 이 고통을 헤쳐 나가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수 없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상념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의 한계에 갇혀 버리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처음엔 그랬다. 이런 내가 원망스러웠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내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그래서 어디로 향할지 모를 분노의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벗어날 수 없는 불안의 두려움에 잠식당한 삶이 싫었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수 십 년째 불안에 끌려 다니는 타고난 천성과 기질을 비난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질책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이것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오랜 시간 불안에 고통받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책망하고 자책하며 현실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와는 다른 정신적 자아의 결함이 성립해야만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고 지금의 현실이 내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혐오…


자기혐오는 또 다른 자기 연민이다. 견디지 못할 아픔과 슬픔으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나와는 다른 혐오의 대상 즉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 하지만 이 또한 자신의 일부이기에 미움이 클수록 남겨진 상처 또한 크다. 내가 겪는 지금의 어려움은 오늘을 잘 살아내고 다가올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 넘어야 할 작은 둔덕일 뿐, 인생의 무게는 경중을 따지거나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다.


1. 최대 60일이다.

한 번에 60일 이상은 처방할 수가 없다. 일반의가 아닌 정신과 전문의라도 향정신성의약품은 60일 치 이상을 줄 수가 없다. 두 달 이상의 처방이 불가능하기에 일신상의 이유로 장기 처방이 필요하다면 치료자와 상의하여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했던 것처럼 허용된 최대 복용량으로 처방을 받아 약을 모으는 방법도 있다. 하나 이는 내담자와 치료자 사이의 굳은 신뢰가 있어야 한다. 다량의 향정신성의약품은 자살에 이용될 소지가 있기에 내담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없다면 치료자는 한 번에 많은 양의 약을 주지 않는다.


2. 나라마다 다르다

향정에 대한 반입 절차는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처럼 마약에 민감한 곳일수록 철저한 확인이 필요하다. 특히 향정을 다량으로 반입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자. 많은 양의 향정신성의약품이 세관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주변에 떠도는 근거 없는 정보는 믿지 말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입국하는 국가의 대한민국 대사관에 문의하는 것이다. 원론적인 답변이 올 수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반입 절차를 안내해 줄 것이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잡아줄 것이다. 아래 내용은 실제 대사관에서 회신받은 향정신성의약품의 반입 절차이다. 하나의 참고 사항으로 여기면 좋을 듯하다.


<대사관 회신>


3. 영문진단서와 처방전

일반의약품, 즉 소화제, 두통약 같은 상비약이 아니라면 의사의 진단서와 처방전을 소지하는 게 원칙이다. 휴대하는 양이 많지 않아 여행자 본인이 복용할 것으로 인정되는 한도 내의 의약품은 관련 서류가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처럼 반입량이 6개월 이상이고, 또한 그 약이 향정신성의약품이라면 의사의 진단서와 처방전을 소지하는 게 좋다. 병원의 직인, 전문의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진단서와 처방전만큼 내가 왜 이 많은 약을 소지하고 있는지 입증해 줄 수 있는 문서는 없다. 그리고 처방전에 총 몇 개월치의 약을 소지하고 있는지 적어주면 더욱 좋다. 또한 발급 날짜와 출국일이 오래되지 않는 게 좋다.


4. 세관 신고

향정신성의약품은 마약류와 같이 분류되어 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현실로 직면하자 심한 반감이 올라왔다. 대사관에서는 반입 약품으로 신고하고 세관 직원의 확인을 받으라 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먹는 약이 왜 마약과 같은 취급을 받는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커다란 나의 아픔과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송두리째 무시당할 것만 같았다. 내 병은 이런 괄시를 당할 정도로 가볍지 않다. 세상천지 모르고 겨우 숨만 쉴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나와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 같은 또 다른 나의 정체성이다. 그만큼 쉽지 않고 아주 무거운 녀석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어떤 확신을 줘야 하는가? 나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신고하지 않았다.


물론 든든한 뒷배는 있었다. 취업 비자가 있고 진단서와 처방전을 가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겨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13개월 치의 정신과 약을 들고 가면서도 반입 약품으로 신고하지 않았다.


결국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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