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장터에 있던 우리 집 마루에 앉아 보면 멀리 덕유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앞쪽에 단지봉이라는 낮은 야산이 있었다.
봄이면 참꽃을 따 먹으러 자주 올랐던 그 산, 여름에는 산 이곳저곳에 피어있던 나리꽃
무더운 여름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을 두 손 가득 받고
키드득 거리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너 시방 뭐 하냐? 빗물 맞으면 손에 사마귀 생긴다니까!"
엄마의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빗물을 탈탈 털고 치마에 쓱 닦으며 손등을 바라본다.
사마귀가 생긴다고,
그 보기 싫은 사마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한다.
그러나 너무 심심하다.
아버지는 물꼬를 살피러 논에 가셨고,
덕유산을 배경 삼아 기세 좋게 달려왔다 달려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엄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상에 어쩌려고 이렇게 비가 퍼붓는다냐. 없는 사람 어떻게 살라고..."
없는 사람의 의미를 알리 없는 나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달리기를 하듯
저만큼 왔다가
다시 성큼성큼 가버리는 빗줄기를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사립문을 밀치고 논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쓰고 있던 거적때기를 헛간에 벗어두고 툇마루로 올라오는 아버지에게 나는 삼베로 된 수건을 건넨다.
빗물을 닦는 울 아버지 크고 맑은 눈 속에 내가 들어가 있다.
나는 아버지 눈 속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좋았다.
"논은 아무 탈 없고요?"
"응,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이렇게 계속 퍼부으면 걱정이네.."
"긍게 말이에요. 웬 놈의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요. 참말로 겁나는 고만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을 들으며 이른 저녁을 먹고 토방에 피운 매캐한 모깃불에 캑캑 거리며 언니와 오빠 그리고 나와 어린 동생들은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었을 때 들려오던 거대한 물소리! 걱정스러운 듯 장독대 옆에 서서 구량천을 바라보던 아버지!
비는 며칠을 그렇게 내리고 또 내렸다.
빗줄기가 잠시 멈추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구량천으로 향했다. 무시무시한 흙탕물로 변한 구량천은 포효하며 거세게 흘러갔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물살과 함께 떠내려오는 가재도구를 건지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 뒤에 숨어 격랑을 치며 흐르는 구량천을 바라보는 나는 무서워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쯧쯧, 어느 집이 다 떠내려왔나 보다. 저 집 식구들은 이제 어쩐다냐, 그래도 물난리 보다 불난리가 낫지. 불탄 끝은 있지만 물난리는 모조리 쓸어가 버리니까 숟가락 몽뎅이 하나도 건질 수 없으니까..."
나는 삶은 옥수수를 뜯어먹고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면서 자주색 감자를 긁으며 언니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넋두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잤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금도 여름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거친 물소리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넘칠 듯 흘러가던 구량천의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지금 가서 보면 구량천은 안양천보다도 훨씬 작은 천인데 그때는 엄청 큰 강처럼 느껴졌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비가 그치고 단지봉에 무지개가 걸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빠졌다.
텅 빈 집에 혼자 남은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단지봉을 향해 집을 나선다.
신작로 고인 물에 소금쟁이 한 마리가 하늘 구름 속에 떠있다. 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장마 전에 없었던 산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만난다. 엄마나 언니가 냇가 물을 떠먹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도토리 잎을 따서 물을 떠 보기도 하고, 헐떡거리는 고무신이 벗고 맨발로 첨벙거려본다. 소금쟁이를 잡고 싶지만 소금쟁이는 그런 나를 비웃듯 성큼성큼 사라져 버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고추잠자리 떼에 마음을 빼앗겨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미끄덩거리는 고무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돌아오는 길
산길 중턱에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도도하게 나를 지켜보던 주황색 고운 참나리꽃!
나는 어릴 적 보았던 참나리 꽃을 잊지 못한다.
참나리꽃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고향과도 같은 꽃이었다.
화단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심은 우리 꽃 중에 물론 참나리꽃도 있었다.
참나리가 우리 화단에서 처음 피었을 때,
나는 대여섯 날 단발머리 꼬마였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참나리[ tiger lily ]
참나리는 백합과 식물로 학명은 Lilium lancifolium Thunb. Lilium tigrinum Thunb이다. 백합 속(Lilium)으로 말나리를 비롯하여 하늘말나리, 하늘나리, 털중나리 등 10여 종이 우리나라에 야생하며, 백합 등 다양한 재배종이 있다.
참나리는 높이 1~2 m 정도로 곧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땅속에 둥근 양파 모양의 비늘줄기가 있으며, 줄기에 잎은 어긋나게 달린다.
적황색 꽃은 한여름에 줄기 끝에 한 개씩 핀다. 줄기와 잎 사이에 구슬 모양의 살눈(주아(主芽)이 달리는데 이 주아가 땅에 떨어져 번식한다. 주로 산지의 암벽이나 제방 등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러시아 동쪽에 분포하고 있다.
‘참나리’는 말 그대로 참(眞) 나리라는 뜻이다.
'나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을 통틀어서 일컫는 우리말로 나비처럼 아름다운 꽃이나 먹는 나물을 뜻한다.
옛 어른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나리 종류를 ‘百合(백합)’이나 ‘나리' 또는 '당개나리’라 불렀고, 야생에서 자라던 종류를 ‘개나리’로 불렀다고 한다.
참나리는 ‘나리꽃’, ‘알나리’, ‘백합’, '호랑이 꽃'이라고도 부르는데, 한글 창제 이전에는 犬乃里花(견내리화)라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참나리'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 국내 1,944종의 식물 이름을 우리말로 정리한『조선식물향명집(朝鮮 植物鄕名集)』에 ‘참나리’로, 물푸레나무과의 목본식물은 ‘개나리’로 표기하면서 정식 명칭이 되었다.
참나리는 사진에서처럼 줄기 윗부분에서 가지를 치고 원줄기와 가지 끝에 꽃이 달린다. 꽃은 7~8월에 피는데 아래를 향해 핀다.
꽃잎은 모두 6장인데 위 사진에서처럼 밖의 3장이 안의 3장보다 폭이 약간 좁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꽃이 처음 피었을 때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꽃의 모양이 조금씩 변한다는 것이다. 처음 아래로 향하고 있던 꽃잎은 점차 하나씩 뒤로 젖혀지다가 마침내 6개의 꽃잎이 모두 뒤로 말린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이른 아침 아래로 피어있던 꽃은 점차 벌어져 하나하나 차례로 뒤로 말려 마침내 이런 모습이 된다.
참나리 꽃잎은 특이하게 짙은 갈색의 무수히 많은 점들이 나있어 깨순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이 특유의 점이 너무 궁금하고 신기했다. 오돌토돌 돌기가 입체감이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져보면 돌기가 느껴진다.
짙은 갈색 부분의 점들의 돌기를 직접 보기 위하여 옆에서 찍은 사진이다.
돌기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가.
6개의 수술은 길이가 5~7 cm 내외로 비교적 길며, 꽃밥의 길이도 약 2 cm 정도에 달한다. 사진에서 가운데 성냥처럼 생긴 것이 암술이다.
참나리 번식
참나리의 번식은 줄기와 잎 사이에 있는 주아(살눈)로 번식한다. 위 사진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줄기와 잎 사이에 검은 주아가 보인다. 이 주아가 떨어져 영양번식으로 자손이 생성되어 유전적으로 동질의 군락을 이룬다. 이 주아(살눈)는 꽃 피기 전에 만들어져 꽃 필 무렵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주아는 둥글고 매끄러워 땅 곳곳에 잘 퍼진다. 위 사진에서처럼 꽃이 핀 참나리 밑에 많은 어린 참나리들을 볼 수 있다.
참나리 효능
꽃이 아름답고 키우기 쉬워 정원에서 화초로 키우며 비늘줄기는 약간 단맛이 나서 식용으로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