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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Oct 30. 2022

네 머릿속의 스피커

제가 낸 소음 아닌데요

이사 온 첫날부터 항의를 받았다. 우리 층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손으로 쓴 공지가 붙었다. 공지 붙은 자리 바로 옆이 내 자취방이다. 밤에 현관문 쾅쾅 여닫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으니 주의해달란 내용이었다. 엊저녁부터 오늘 동틀 때까지 줄곧 집안에 있었으니 난 아니다. 그런데 왜 내 방에 가깝게 붙인 거야. 사람들이 내 탓인 줄 알겠네. 못마땅하기도 잠시.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단 걸까?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전날은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다섯 시까지 뜬눈이었다. 잠에서 깰 정도의 소리면 내게도 들렸을 텐데. 기억나는 순간이 없었다.




같은 층에 예민한 사람 있나 보네. 그럼 피곤한데. 이 얘기를 들은 엄마가 말씀하셨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면 내가 범인으로 몰리기 전에 선수를 쳐야겠단 생각을 했다. ‘소음은 없는데 소음을 들었다는 사람만 있다’고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내는 거다. 층마다 CCTV가 있으면 좋겠지만, 도로에서 원룸 건물로 들어오는 공동 현관에 딱 하나뿐이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우리 층 사람들의 방 앞에 쌓인 짐이 다였다. 생수 더미,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낸 옷상자, 아마도 대학생 전공 수업 교과서인 것 같은 책들. 책은 내 방 건너편에 있는 방 주인이 내놓은 거였다.


난 건넛방 사람이 대학생인 줄 알았다. 그 사람이 경찰과 실랑이하는 걸 듣기 전까진 말이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동생과 밥을 먹는데, 건넛방과 우리 방 사이에 사람들이 우르르 오더니 옥신각신했다. 여자 하나가 헐떡이며 말을 실타래처럼 풀어냈다. 그 사람이 날 계속 노려봤다니까요 그냥 쳐다본 게 아니었다니까요 경찰이 시민 말을 이렇게 안 들어주셔도 되는 거예요? 서울 토박이 말투를 쓰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경찰관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그분한테 여쭤보니까요, 지나가는 길에 선생님이 보여서 본 거일 뿐이래요. 바깥에서부터 오래 시달린 듯 지친 목소리였다.


건너편 사람을 마주쳐도 쳐다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녀와 눈을 마주칠 일이 생겨버렸다. 반차를 내고 오후 세 시경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건넛방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니 머리가 헝클어진 중년 여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요, 지금 공부 중인데 발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 여자가 내게 말했다. 아, 제 발소리가 그렇게 컸나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오늘 열 시쯤부터 그쪽이랑 제 방 사이에서 쿵쿵 걷는 소리가 계속 났거든요? 조금만 주의해주세요. 동생은 학교, 나는 회사여서 집이 빌 때였다.


그 여자는 자기 건너편에 사는 사람, 그러니까 내가 복도에서 시끄럽게 군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린 거다. 그게 아니고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 여자가 튀어나온 게 설명이 안 됐다. 죄송한데, 저랑 제 동생은 아침 일찍 나가서 말씀하신 시간에 여기 없었거든요.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닌지. 아니, 발소리가 시끄럽게 계속 났는데…. 여자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자와 언성 높여 대화했던 경찰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선생님, 누가 노려보는 것 같다고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발로 차시면 어떡해요?


일단은 조심할게요. 난 그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도 집주인이 건너편 여자의 상태를 대강 알고 있었다. 주말 오전이라 집에 있는데, 집주인이 그 여자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예민하면 여기 못 살아요. 같이 사는 데선 다른 사람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데 그거 갖고 계속 불평하면 어떻게 해요? 집주인이 여자에게 쏘아붙였다. 자기가 말한 ‘다른 사람 소리’라는 걸 사실 아무도 낸 적 없으며, 그 여자 머릿속에만 있단 건 모르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발이 긴장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 자취방까진 네 걸음. 발뒤꿈치 부닥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으로 톡톡 걷는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향하기 전에 뒤돌아 건넛방을 바라본다. 그 여자가 또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며 불쑥 튀어나올까 봐, 영문도 모르고 뒤통수를 얻어맞을까 봐, 나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현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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