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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Jun 28. 2022

달밤의 빨래

내 빨래가 옥상으로 쫓겨난 이유

고시원 옥상에선 온갖 일이 일어난다. 줄넘기하는 사람도 있고, 통화하는 이도 있고, 그냥 날씨를 보거나 바람 쐬러 나온 누군가도 있다. 옥상엔 달빛뿐이어서 한밤중이면 어두컴컴했다. 거기서 빨래를 널고 있으면, 밤에 옥상 문을 열고 올라온 사람들이 날 보고 ‘억’하고 놀라곤 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고시원 방은 빨래 널기엔 너무 좁았다. 건조대를 피면 난 종일 침대에만 올라앉아 있어야 했다. 여기 이사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빨래 널 곳을 찾아다니는 거였다. 계단참에 소형 건조대가, 옥상에 대형 건조대가 여럿. 옥상 허공엔 빨랫줄도 있었다. 누가 빨랫줄에 넌 게 떨어졌는지 바싹 마른 청바지 하나가 시멘트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주워서 널어줄까 하다 관뒀다. 바닥 먼지로 더러워진 줄도 모르고, 새로 빤 옷이라며 입을 옷 주인이 생각나서였다. 차라리 ‘떨어졌네’ 하고 다시 빠는 게 낫지. 변명 같아 보여도 이쪽이 양심적이다.                


옥상은 여러모로 빨래 말리기엔 불편했다. 빨래만 말리는 공간이 아니라서 그랬다. 늦은 밤에 빨래를 널고 있으면 굼뜬 걸음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한둘 있었다. 난간에 기대 야경이라도 보나 싶으면, 이내 도깨비불 같은 빨간 점이 멀리서 아른거렸다. 담배를 피우는 거였다. 알싸한 담배 냄새는 밤바람을 타고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보다도 밤 공기가 상쾌해서 다행이었다. 이튿날 보니 다 마른 옷에 담뱃재가 묻어있었다. 바람에 날려온 게 비단 냄새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부턴 실내 빨래를 널었다. 고시원 주인이 그래도 된댔다. 건물 안에 있는 건조대를 써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끄덕인 건 그쪽이었다. 몇 주간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참에 있는 건조대사용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 말랐으면 입고 나가려고 전날 널어둔 옷을 보러 갔는데, 처음 보는 옷이 걸려있었다. 누군가가 내 옷을 빼서 난간에 겹겹이 쌓아두곤 본인 걸 넌 거였다. 그러니 말랐을 리가.                


다른 데 건조대가 남아도는데 왜 하필 여길 쓰는 거지? 그것도 남이 널어둔 걸 죄다 빼놓고. 축축한 옷가지를 안아 들자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다. 건조대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갈까 고민하는데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양심 있으면 본인 거 사서 쓰세요~’ 양심? 양심 없는 건 본인이지 왜 내 탓을 하나. 1층 경비실로 내려가, 앉아서 조는 고시원 주인을 깨워서 캐물었다. “복도에 나와 있는 건조대는 고시원 거 아녜요?” “아, 개인이 들고 온 것도 있을 텐데….” 그럼 전에 물어봤을 때 말을 해줬어야죠.               




덜 마른 채 방치된 옷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별수 없이 다시 빨아야 했다. 축축한 빨래를 한 아름 안고 간만에 옥상엘 갔다. 팡. 빨래를 터니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팡. 그러나 내 억울함까지 떨칠 수는 없었다. 그 인간이 잘못 알려줬단 변명은 안 통하겠지. 내 사정이야 어쨌건 세상은 모르쇠고, 그러니까 옥상에서 한숨 쉴 겸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는 거다. 그날도 누군가 굴뚝처럼 후-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게 또 나를 억울하게 했다. 내일은 옷에 담뱃재가 묻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시원 옥상의 빨랫줄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현위치◀)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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