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속 믿음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때 누구나 떠올릴 법한, 상투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질문을 대학교 1학년 교양 강의 도중 교수님으로부터 받았고, 당시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 자신을 과연 언제쯤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정체성이란 비본질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행이기도 했었다. 내가 누구인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내 모든 삶이 허무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 고정되거나 경계 지어지기 싫어하는 그런 성격 때문인지, 나는 나의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도 꺼렸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배회하며, ‘이 순간의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는 대답은 아마도 불안정성 속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안정성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지, 수업이 끝나고 잠깐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 ‘불안정성 속의 안정성’이란 곧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믿음이 있을 때 평온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를 가진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이 곧 불안정성 속의 안정성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러한 안정을 종종 부러워하곤 했다.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정체성의 불안정성 속에 고정된 안정성이란 없는 걸지도, 그저 믿음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사실 있다고 하면 조금은 무서울 것 같다. 하나의 (말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쩌면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이고, 나는 변화시킬 수 없는 숙명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정체성을 논할 때 나는 비본질주의적으로 접근을 ‘해야만 했다.’
다시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정체성에 대한 논의들과 같이 이때의 믿음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나의 끊임 없는 선택의 연속에 의해 생겨나고, 믿음을 기반으로 다시 선택하며, 우리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잡는다. 사실 세상에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믿는 것만이 있을 뿐. 우리가 필연적이지 않은 것을 고정된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안정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심지어는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또 그러한 믿음에 입각해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혼란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의식 속에서 막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은 정체성을 바꾸기도 한다. 가령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러한 믿음이 쌓이면 유동하는 정체성 속에서 굳어진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가? 조금 다른 질문이지만 사실 묻는 것은 같다. 변화무쌍한 나의 정체성은 말로(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할 수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믿음은 불안정성 속 안정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언어로써 수행하는 정체성은 곧 정체성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