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속 애도의 공동체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불러내는 것은 음성으로 수행되는 발화다. 하지만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는 음소거 상태의 발화가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킨다. 이때 탄생하는 주체는 광주에 대한 애도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작중 연극이 상연되는 가운데 죽은 소년을 불러내는 초혼 장면에서 배우, 관객, 독자의 화합을 통해 빚어진다. 연극의 현장에 함께하는 이들은 무언의 발화로써 서로 공명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소년과 소년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합쳐져 인칭을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이 걸어 나옴을 느꼈다. 그 서술의 한 부분은 이렇게 진행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 한강(2016), 『소년이 온다』, 창비, 100쪽.
이 문장들은 소설 속에서 이탤릭체로 표기된다. 『소년이 온다』에서 이탤릭체는 실제로 말해질 수 없거나 서술자의 목소리를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발화에 주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죽은 자 또한 아무런 매개 없이 독자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된다. 위의 경우 이탤릭체는 음성으로 발화되지 않은 대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작중의 연극에서 이 대사들은 검열에 의해 지워져 말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극의 배우들과 대본을 쓴 작가, 그 대본을 교정했던 ‘은숙’은 이미 모든 대사들을 알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들은 배우들의 입술에 집중하며 이 음소거된 발화를 읽어내려 애쓴다. 이처럼 무성성(無聲性)이 이들을 한마음으로 함께하게 만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나는 이 문장들이 애도의 정동을 일으킴으로써 5·18의 기억을(간접적인 기억을 포함해) 가진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한다고 느꼈다. 이때 문자로 적힌 이 무언의 문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대신 문장들이 전달하는 정동에 반응하여 배우, 관객, 작가, 그리고 독자가 하나의 공유된 기억을 매개로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독자로서 함께 입술을 움직이며, 알지 못하는 소년을 생각하며 이 문장들을 읽어내렸다. 그리고 그때 나 또한 참여하는 애도의 공동체가 문장에서 꿈틀대며 살아 일어남을 알 수 있었다.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정동적으로 느껴지는 공유된 감각이 소리 없는 무대를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