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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전하는 따뜻한 정감

촉각에세이

by 백년서원

특별한 외출 계획이 없는 주말 오전, 물걸레를 손에 쥐고 가구에 앉은 먼지를 닦는다. 나의 오랜 살림살이들을 살뜰히 돌보는 평범한 일상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세간살이는 내 손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세수한 듯 빛이 난다. 그 말쑥함이 뿌듯해 걸레질에 더욱 정성이 들어간다. 여자의 살림이란 게 젊어서는 부담이더니 중년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니 그 느낌이 또 다르다. 삶의 일력이 정오의 축을 지나온 지 오래되어 태양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같이 길어지는 시간이다. 생체시계가 오후 6시쯤 되고 보니 삶의 태도 또한 갈수록 겸손해진다. 마음먹기에 따라 걸레를 든 사소한 시간마저도 먼지가 아니라 내 마음을 닦는 수양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청춘은 무엇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때는 그 어디에도 지금과 같이 낮은 마음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던 것 같다. 노년이란 휴식기가 이렇게 큰마음으로 속개되고 있음이 낯설지만 흥미롭다.




오래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소녀감성이 최고조일 때 접해서인지 내가 살아갈 날들의 구심점이 되었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생각했지만 살면서는 정작 '지란지교'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 먼지를 닦기 위해 걸레를 잡을라치면 무의식으로 들어오는 한 줄이 있었다.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창문을 열다가...' 반닫이 닦는 게 뭐라고 그 문장이 떠올랐을까?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는 마음을 뭐라 이름해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여보, 자개장은 내 취향이 아닌데 어떡하지? 꼭 자개장으로 들여야 할까?"


30여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안방에 놓을 가구를 새로 들여야 할 기회가 있어 남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때는 형제분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화려한 전통 자개장롱을 들여놓고 살 때였다. 자개장은 나전칠기 장인들의 작품으로 가격이 만만치도 않았지만 형제분들은 모두 중년의 살림이었기에 그 연배에 맞는 더없는 맞춤 가구였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작품이라도 나에게 있어서 자개장은 나이가 지긋한 중후반의 취향일 뿐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가구의 품목과 그 배치는 삶의 품위와 취향을 말해주는 안주인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들여놓는 것도 큰일이라 쉽게 결정할 일도 아니다. 내가 그 당시 들여놓게 될 가구도 노년까지 오래 사용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기에 머리가 더욱 복잡했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20대 후반으로 아이 둘 키우기도 정신없는 육아맘으로 살림 보는 안목이 턱없이 미숙할 때였다. 더 마음이 쓰이는 일은 시부모님이 새집에 장롱을 사 넣어주는 케이스라 싫고 좋고 내 주관을 말하는 게 과연 맞는 건가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침내 나의 취향에 꼭 맞는 가구를 들여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 있게 선택한 가구는 원목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고가구'풍이었다. 한국형 '앤티크가구'쯤으로 설명이 될까? 섬세하고 고풍스럽고 우아미까지 갖춘 원목 가구를 발견하고 바로 "이거다"를 외쳤다.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멋들어지게 새겨져 기품마저 느껴진 원목에 손이 저절로 갔다. 그 매끄러운 감촉은 따뜻한 정감을 주었고 마음의 안정감마저 덤으로 주었다. 물건도 만나야 될 인연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화려한 자개장에 비할 바가 못되게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렇게 20대 후반에 만난 원목가구는 40년을 넘겨가며 나와 함께 세월을 더해 가고 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멋이 나무에는 있다. 본질이 아름다운 것,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어도 그 자체로 멋스러울 수 있는 것은 나이테만이 만들 수 있는 독자적인 매력이다.


목공을 배워보고 싶었다. 뭔가 뚝딱뚝딱 만드는 재미도 줄 것 같고 집중하면 잡념도 잊을 것 같았다. 자르고 문지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보면 신날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목공소는 근처도 못 가보았다. 나무를 좋아했지만 왜 좋은지는 이유를 몰랐다. 그냥 좋았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한 그루 나무로 환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거리에 가로수도 참 잘생겼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뭇가지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팔을 뻗는 것 같아 보이지만 쓸데없는 몸짓은 없다. 바람과 햇살이 이끄는 각도에 따라 그 범주를 넓혀가는데 거짓된 몸짓이 있을 수가 있나? 더욱이 겨울나무에서의 그 행위예술은 더욱더 그 적나라한 아름다움의 절정 보여준다. 그 어디에도 거짓된 몸짓은 없다.




나무를 좋아해 아직도 한옥에 살고 싶은 로망이 있고, 소반, 차탁, 차받침, 대청마루, 책걸상, 그루터기, 나이테, 무늬목, 도마, 정자, 테이블, 반닫이... 보이는 것, 쓰이는 것 모두 나무로 만든 것은 다 좋다. 생활 전반에 걸친 일상 소품들은 가치소비에도 한몫한다. 친환경에 재사용의 의미가 함께하는 원목은 자원낭비 측면에서도 얼마나 실용적인가! 거기다 우리 삶의 끝에서 입고 가야 할 '나무 옷'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나 애착하는 한 가지는 있는 것 같다. 굳세고 의연함 그리고 든든한 믿음을 주는 나무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애착의 대상이다. 그 따뜻한 정감이 나를 무한대로 끌어당겼으니 나도 그 본질을 닮았으려나? 살아가던 어느 날 반닫이를 닦다가 나는 어떤 품종 어떤 무늬목을 하고 있을지 내속을 들여다본다. 60년이면 제법 고목인데 혹시 잡목? 행여 그렇다 할지라도 튼튼하게 내린 뿌리는 내 자랑으로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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