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은 꺼진 채로
일본에서의 네 번째 밤, 여행을 왔다는 설렘이 조금 사그라든 지 오래이다. 난 언제나 익숙함, 지루함 이런 단어에 취약하다. 처음 하는 일에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반면에, 익숙해져 지루한 일에 대해서는 진지한 적이 한번 없다. 첫날과 다르게 지하철의 출구를 빠르게 찾는다. 네이버지도보다는 구글맵에 익숙해져 거리도 잘 걸어 다닌다. 밥을 다 먹고 나와 일본어로 ‘잘 먹었습니다’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적응을 잘하는 내가 자랑스럽지만, 빠르게 적응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빠르게 지루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도 된다. 난 4일 만에 이곳의 생활에 쉽게 적응해 버렸고 그런 일로 첫날에 느꼈던 여행의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선다. 클럽을 나다녔던 며칠의 후유증으로 밤낮이 조금 바뀌어 1시가 되어서 방을 나선다.
오늘은 일본에서도 제일 끝에 있는 지역 에노시마로 향하기로 한다. 2시쯤 길을 걸어가는데 차라리 더운 날씨를 피한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에노시마로 향하기 위해서는 ‘에노덴’이라는 전차를 타야 한다. 며칠 전부터 봐뒀던 유튜브 채널에서 하라는 대로 차근차근 에노덴 패스를 끊는다. 1000엔짜리가 많이 없는 탓에 10000을 내고 잔돈을 차분히 정리하는데, 갑자기 아직 꺼내가지지 못한 티켓이 쏙 들어가 버린다. 빌어먹을 동전들이 아직 채 정리되지도 못한 채 나는 이 상황에 어이없어하며 멍을 때린다. 옆에 상담 센터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내가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상상되지 않고 , 이야기할뿐더러 돈을 돌려줄까 하는 마음에 그냥 1700엔 (한화로 16000 정도)를 포기하기로 한다. 괜히 서러운 마음에 울적해지려고 할 때 에노덴이 도착하고 나는 기차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에노시마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해남 군산 이 정도가 되려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혼자서 뚜벅뚜벅 잘도 지나다닌다. 작은 신사에서 더 멋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 그리고 제발 올해에는 혼자 외롭게 늙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별것도 없는 전망대를 500엔을 주고 구경하고는 바로 미리 봐뒀던 테라스가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바다의 짠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 그게 그리도 기분이 좋았다. 맥주를 마시면 점심 내내 빨개져 다녀야 하지만 맥주를 먹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에노시마의 명물 쓰기치 라는 멸치덮밥과 에노시마 맥주를 음료로 시킨다. 다 먹고도 멀리 보이는 바다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각자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곳에서 당분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서는 맥주와 문어구이 아이스크림 등을 더 시킨다. 일종의, 더 있겠으니 눈치를 주지 말라는 작은 부탁이다. 난 그 기분 좋은 곳에 앉아 예전에 빠르게 읽어버렸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내가 달리기를 할 때 하고 싶은 말‘을 읽는다. 하루키의 문체를 닮고 싶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의 문체는 지독하게나마 솔직하다. 글쓰기라는 것 특히 불특정다수에게 노출되는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가식과 꾸밈을 담기 마련인데 (물론 실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난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의 글에는 그런 게 보인적이 없다. 달리기를 하고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수영을 하는 , 그런 소소하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단단한 삶들을 그는 살아가고, 나는 천천히 그의 글을 읽는다. 나는 자뭇 내 인생을 돌아보고, 꽤나 방탕하고 방황했던 삶이구나를 깨닫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는 그런 ‘정화’의 요소가 있다. 그런 글을 알코올이라는 독성을 들이키며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7월부터는 아침 수영을 다닐 것을 다짐한다.
그날 저녁에는 헤비 인스타유저답게 인스타에 올릴 사진들을 고르고, 편집하고, 업로드한다.
여행 중에는 인스타를 꺼놓고 활동 정지 상태로 돌입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그러기에는 난 너무 인스타에 절여져 있다. 사진을 업로드해 놓고, 인스타를 삭제했다가 받았다가를 반복한다. 여행지까지 와서 이러는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인스타를 껐다 지웠다 켰다를 반복했기 때문일까? 배터리는 금방 바닥을 보였다. 이건 내게는 굉장히 큰 핀치였던 것이 , 일본에서는 아무 데서나 충전을 하기에는 힘들고 충전기계를 빌리기 위해서는 휴대전화 화면을 켜놓기는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터리가 모두 나가고, 내 숙소까지는 꽤 먼 정거정만이 남았다. 국제미아가 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막막한 마음이 들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되뇌며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내놓기 민망한 일본어로 지나다니는 일본인을 붙잡고 신주쿠로 어떻게 향하는지 물어보고 지하철을 탄 후, 역에서 내려서는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숙소를 대충 떠오르는 건물의 형태를 찾아 일단 발걸음을 했다. 막막한 생각에 들 때마다 오히려 좋다며 편의점에 들어가 자꾸 먹을걸 사 먹었는데 그렇게 걸어가며 먹은 디저트가 장장 1000엔(한화로 10000원) 이 넘었다. 20분 거리를 1시간이 넘으면서 도착했지만, 그리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행을 온 건데 뭐가 시간낭비겠는가. 그저, 헤비 인스타 유저인 나를 가볍게 비난하고, 또 미리 보조 배터리를 잘 충전해 놓지 않은 날 미워했을 뿐이다. 언젠가 나의 이 털털함이 , 날 무너트릴 날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미래의 나를 걱정한다.
그렇게 나의 여행이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