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
군대라는 곳은 어떤 것일까. 내 가장 가까운 후임 a는 내게 자주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다. 김훈민 병장님은 군대에 남자만 가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이렇게 우리가 뺑이치고 있는 동안에 여자들은 인턴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고 취업 준비도 하지 않습니까. 사실 수도 없이 해본 생각이다. 반수 하기 전 나는 서울 시내의 c학교에 재학했었는데 거기에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급진적 보수적 페미니즘 단체의 일원들이 나를 끊임없이 영입하러 들었다. 페미니즘은커녕 내 앞가림조차 힘들어하던 나는 어떤 누나를 따라 어떤 페미니즘 학회를 얼떨결에 구경 갔었다. 왜 이 학회에 들어왔냐는 질문에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 음.. 가끔 친구들이 하는 혐오 발언을 듣는데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라고 얼버무렸다. 난 그곳에서 여러 여성 혐오표현들을 배우고, 어떻게 미러링 할 것인지 그 대책들을 듣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 강하고 거센 사상들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각했던 건 왜 이곳에서는 ‘남성의 징병’ 문제에 대해서 또는 ‘여성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완화된 체력검정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건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픈 곳을 다시 다시 계속 후벼 파고 아파하며 그 아픔의 근거를 남성들에게 돌리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난 그 아픔들에 공감하면서도, 아… 이 얼마나 무기력한 논의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음날 날 그 학회에 이끌고 간 누나에게 남성의 징병 문제와 체력검정 문제들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얼버무리면서도 우린 더 거세게 반응해야 한다며 혁명가와 같은 말들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녀와의 연락을 자연스럽게 끝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살이었던 김훈민은 23살 그토록 가기 싫었던 군대를 가게 된다. 불쌍하게 끌려가 조교가 된 아이들은 실컷 짜증을 내며 훈련병들을 억압하는 방법들을 배운다. 그들 와중에는 가끔, 그들이 하는 일이 사회의 한 중대한 책임을 맡은 양,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그 허울뿐인 권력을 광기에 띈 미소로 휘두르고, 우리 훈련병들은 장장 2년 동안 겪을 일을 암시당하며 눈을 질끈 감고 적당히 해낸다. 훈련소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어쩌면 ‘작은 우애’ 나 ‘끈기’ 같은 것들이나 혹은 종교활동을 하며 주는 작은 초코파이들을 얻어내고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았다며 크게 얘들이랑 웃어댄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조금 낫겠지 하며 갔던 자대라는 공간은 더 폐쇄적인 권력관계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군대라는 공간이 아니었으면 친구나 형이나 동생으로 지냈을 이들이, 권력관계가 만들어지며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가까운 과거에는 군대에 가면 어른이 되어 나오겠다는 주제의식으로 만들어진 광고가 나오고, 사람들도 진짜 그렇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건 맞는 사실이다. 우린 실제로 군대에 다녀오며 어른이 된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랫사람’이라고 믿는 이들을 적당히 회유하고 적당히 압박하면서 스스로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미세한 처세술을 배운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병사들은 또, 간부들에게 그렇게 적당히 회유당하고, 부당한 일에 분노하면서도 그 생기를 잊어가며 굴복한다. 사회에서는 일당 10만 원이 넘을 것 같아 보이는 위험하고 힘든 일도 휴가를 위한 가점 2점이면 눈이 돌아 이 정도면 혜자라며 일에 착수한다. 높은 분들의 짧은 방문은, 간부들을 살 떨리게 만들고, 그건 곧 우리들의 무의미한 청소와 차출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머물며, 우리들이 지키는 것이 나라인가 우리들이 감히 우러르지도 못하는 이들의 편안함과 명예욕인가 그것이 의심이 되기도 했다.
또 나의 전역 예정일이었던 2024년은 병사들의 사망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았던 해였다. 훈련병들의 미세한 목숨줄은 가끔 위험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떤 먼 곳의 사단장에게, 군장을 메고 얼차려 같은 걸 받아보지도 않았을 어쩐 중대장에게 달려있기도 했었다. 무기력한 공군 병장 나부랭이는 그 소식들을 들으며 그저 그 병사들이 어떤 사이트들에 나돌며 조롱거리가 되지는 않기를 빌었다.
군대라는 공간에 들어서며 나는,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마지막을 맞이했을 때 스스로에게 떳떳한 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21개월은 너무 길었고, 더 야비하고 악독하고 기회주의적인 이들이 더 좋은 것을 이뤄내는 이 좁고 한탄스러운 공간에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포기했다. 어느 순간에 나는 더 야비하고, 악독하고, 기회주의적 인물이 되어있었음에도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위축되어 있는 신병에게 사회에서는 하지도 못했을 농담들과 질문을 하는 병장의 나를 스스로 인지한 것이 그걸 자각하게 했다.
내 후임은 내게 물었었지. 이건 불평등하지 않냐고, 이건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군 생활을 맞이하며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본다. 그래 그건 너무 불평등하다. 불합리하다. 군대를 다녀오며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어떤 이들은 그 아픈 기억을 잘 치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헌법재판소에는 병역의무를 남자만이 지는 병역법에 대해 불평등함을 토로하며 헌법 소원을 제기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군대라는 공간의 생생한 기억을 잃을 때까지는 아마 헌법재판소는 그 불평등함의 사유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헌법 소원에 대해서 기각판정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20대 남성들은 다시 끌려오고 , 사고라는 명목하에 몇몇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우리에게 잊혀 갈 것이다. 거대한 불합리함은 가끔, 정당하지 못한 불합리함에도 그 크기가 거대하다는 이유로 혹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용인되고는 한다. 병역 불평등 문제는 가장 좋은 예시가 된다. 군대에서 햇청춘을 보내야 하는 우리는 각자의 불합리함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의 고통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우린 언제나,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느낄 수 없고 공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더 침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만일 군필자였다면 여성들이 여성들이어서 겪는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그 거대한 불합리함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군인들에 공감했을 것이다. 공군이라는 적당한 곳에서 적당한 부대로 떨어져 적당한 일을 하며 지냈던 나는 또 더 어렵고 고통스럽고 춥고 뜨겁고 아프고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날 페미니스트 학회에 데려갔던, 그 누나는 이 군대 문화에 대해서 그리고 남자로서 감내하는 불평등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즉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관심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페미니 반페미니 하는 논의에 관심은 없다. 군필자들의 대다수는 굳이 따지자면 반페미겠지만 여자들이란 ~
‘그 성별’ 들이란 하는 말을 쉽게 하는 이들 또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수많은 청춘들이 보낸 2년의 시간들이 안타깝고 쉽게 묵인되는 그 희생들이 마음이 아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