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을 함께 살던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비슷한 시기에 애정을 갖고 키우던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잇달아 죽어버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생명이 있는 것은 키우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다짐은 십 년 동안 잘 지켜졌다.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산책을 하는 강아지를 만날 때나 싱그러움을 머금은 식물들을 볼 때면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럭저럭 잘 참았다.
그런데 작년 봄, 딸아이가 하굣길에 작은 화분 한 개를 안고 왔다. 식목일 행사로 학교에서 직접 고르고 심었다며 환한 얼굴로 들어오는데, 도저히 싫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또 죽을까 봐 키우기에는 겁이 났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얼떨결에 키우게 된 무늬 산호수에 딸은 '초록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초록이는 손이 가지 않는 의젓한 친구였다. 정이 들까 봐 일부러 못 본 체하고 사랑을 주지 않았는데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록이는 어느새 연둣빛 새 잎을 틔우고 있었다.
야리야리한 이파리를 보는 순간, 헛된 다짐 따위는 와르르 무너졌다. 무관심 속에서도 잘 자라준 것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때부터 애써눌러왔던 사랑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말을 걸고, 날짜에 맞춰서 물을 줬다. 잎이 마른 것 같다 싶으면 분무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록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새 식구는 열아홉으로 늘어났다. 식물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기꺼이 식집사*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나를 기다린 식물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식집사의 하루는 시작된다. 초록이, 다정이, 연두, 페페, 별이, 사랑이, 귤이, 방울이...... 이름을 차례대로 불러준다. 창문을 열고 통풍이 잘 되는 베란다에 식물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파리를 관찰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식물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꽤나 공을 들여야 한다.
여름에는 해가 뜨겁지 않은 반그늘이라면 하루 종일 통풍을 해도 좋지만, 겨울에 온종일 베란다에 두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 내놓고 들여놓기를 반복한다. 여름에는 습기가 애를 먹이고, 겨울에는 보일러 가동으로 인해 식물들이 건조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봄에는 묵은 잎이 떨어지면서 나무들이 생기를 잃고 볼품없게 변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관심과 응원이다. 식물을 키우지 않는 분이라면 안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렇다. 식물도 자주 들여다봐주고 격려해 주면 더 빠른 속도로 새순을 틔우고 다시 예뻐진다. 이파리의 먼지도 헝겊으로 수시로 닦아주고, 주기적으로 샤워도 시켜줘야 한다. 먼지가 쌓이거나 건조해지면 벌레가 생긴다. 식집사로 사는 일이 여간 바쁜 게 아니다.
화분이 늘어날수록 관리를 위해 쏟아야 하는 시간도 늘어나지만, 그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루는 친구가 놀러 와서 식물에 푹 빠진 내 모습을 보더니, “쟤들이 사람이었으면 버릇 나빠졌겠다.”라고 놀려댔다. 놀려도 어쩔 수 없다. 식물도 사람만큼이나 개성이 다르니 하나하나 다르게 대해줄 수밖에. 나의 과잉보호에 대한 보답으로 식물들은 매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식물이 주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었다. 작은 식물들조차 사력을 다해 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묵묵히 힘든 시간을 견디는 강인함과 생명력 앞에서는 장엄함까지 느껴졌다.
오늘 아침에는 이름도 다정한 ‘다정큼’ 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다. “장하다, 애썼다.” 칭찬을 퍼붓고 욕실로 옮겨 물을 흠뻑 주었다. 문득 빗물도 맛보게 해주고 싶고, 햇볕과 바람도 충분히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마당이 있는 집을 꿈꾸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땅이든 베란다든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식물이 있다면, 그곳이 나의 정원이 아닐까.
얘들아, 앞으로도 이 마음 변치 않을 테니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식집사 : '식물'과 '집사'의 합성어로 반려 식물을 키우며 기쁨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신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