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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Oct 19. 2022

[어딘글방] 나의 건조 일지 _ 보래

토요글방에서 만난 보래의 글입니다. 


우리 집엔 세제 광고에서처럼 맑은 하늘을 보며 힘차게 옷을 털 공간도, 24시간 옷을 걸 베란다도 없었다. 내 방이 곧 안방이었고 부엌이었으며 베란다였다. 겨우 만든 공간에 건조대를 펴 옷을 널면, 방 전체에 금방 습기가 찼다. 작정하고 습기를 내뿜는 사우나는 땀이라도 개운하게 뺄 수 있지, 이 어설프게 가득 찬 습기는 모래주머니 단 것처럼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비까지 오는 날이면 금방이라도 액체로 변할 것 같은 상태의 공기 입자들이 방을 둥둥 떠다녔다. 그런 날엔 창문을 열어도, 닫아도 문제. 나는 창문 여닫길 반복하다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내 옆구리에 숨겨져 있던 아가미가 불쑥 튀어나오는 걸 상상하면서.”




나의 건조 일지 


보래


자취를 시작했다. 침대와 책상 하나 놓으면 끝인 세 평짜리 좁은 공간이었다. 손님 한 명 앉을 데가 마땅치 않았지만, 내 몸 하나 누울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싶었다. 구멍 난 방충망에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손바닥만 한 창문도,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한 칸짜리 인덕션도 그럭저럭 쓸 만했다. 손님은 밖에서 만나면 되고, 빗자루로 몇 번 쓸면 청소가 끝났으며, 새벽 여섯 시 반 출근에 저녁 일곱 시 퇴근인 나로서는 창밖을 내다볼 일이 없기도 했다. 사는 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도 적응하기 힘든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빨래였다. 정확히는 빨래를 건조대에 말리는 과정이 끔찍했다. 세탁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축축하게 젖은 옷을 꺼내 건조대에 넌 뒤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도 그랬다. 


방 한쪽을 차지한 건조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례도에 나오는 인간 형상처럼 양팔 나란히, 의 상태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주인인 나도 침대에 겨우 누울 뿐, 나머지 공간은 자리가 마땅치 않아 잠깐 서서 오가는 게 전부인데, 이 건조대란 놈은 주인과는 다르게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 사선으로 150cm까지, 나보다 겨우 14cm 작은 길이였다. 게다가 건조대 이름은 ‘퍼펙트’면서, 부실한 살대를 가졌다. 조금만 한쪽으로 치우쳐 옷을 널면 어느 순간 주저앉아 버렸는데, 나는 그게 꼭 허우대만 멀쩡하나 내실 없는 인간처럼 보였다. 


맥없이 쓰러지는 건 제품 문제니까 차치한다 해도, 건조대의 형상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건조대를 세워놓고 있노라면, 내 옷들을 잔뜩 뒤집어쓴 어떤 존재가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특히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그놈이 언제라도 생명을 가진 무엇으로 변해 나를 덮쳐버릴 것 같아 괜히 불안했다. 


우리 집엔 세제 광고에서처럼 맑은 하늘을 보며 힘차게 옷을 털 공간도, 24시간 옷을 걸 베란다도 없었다. 내 방이 곧 안방이었고 부엌이었으며 베란다였다. 겨우 만든 공간에 건조대를 펴 옷을 널면, 방 전체에 금방 습기가 찼다. 작정하고 습기를 내뿜는 사우나는 땀이라도 개운하게 뺄 수 있지, 이 어설프게 가득 찬 습기는 모래주머니 단 것처럼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비까지 오는 날이면 금방이라도 액체로 변할 것 같은 상태의 공기 입자들이 방을 둥둥 떠다녔다. 그런 날엔 창문을 열어도, 닫아도 문제. 나는 창문 여닫길 반복하다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내 옆구리에 숨겨져 있던 아가미가 불쑥 튀어나오는 걸 상상하면서. 며칠에 걸쳐 말린 옷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눈 딱 감고 입고 나가자, 하다가도 살을 좀 먹을 것 같은 냄새에 고통스러웠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입던 옷을 벗어 다시 세탁기에 처박아 넣었다. 


가까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했다. 좋게 생각해, 가습기를 따로 사지 않아도 되잖아. 그가 말했다. 건조대 위에 널어둔 이불에서 물이 바닥으로 뚝, 하고 떨어졌다. 아니 난 이대로 못살아. 전기건조기, 그것을 들여놓자.


책상을 내버린 자리에 130만 원짜리 건조기가 들어섰다. 한 달에 55만 원, 관리비까지 62만 원의 월세를 내는 나로서는 확실히 부담이었다. 그러나 12개월 할부, 그러니까 하루에 9천 원으로 매일의 쾌적과 마음의 평화를 구매한다고 생각하면 그럴듯해 보였다. 하루라도 빨리 살뜰하게 돈 모아 원룸을 벗어나도 시원찮을 판에, 떡하니 큰돈 주고 물건 들여놓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네 처지를 알라고 지인들이 나무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도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서 사는 거야.


가로 70cm, 세로 60cm의 폭. 방에서 삼 분의 일만큼 차지하는 네모난 기계는 생애 처음으로 직접 산 가전이었다. 냉장칸 하나만 있는 소형 냉장고, 이십 년 된 벽걸이 에어컨, 6kg 드럼 세탁기가 월세방 옵션이었는데, 에너지효율 5등급이란 스티커가 한결같이 커다란 크기로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내 건조기에 붙은 에너지효율 1등급 스티커는 유난히 빛났다. 더 크게 붙어 있어도 좋을 만큼 그랬다.


건조가 끝난 건조기 문을 열면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안에 손을 턱 넣으면 바삭하게 마른 옷들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우리 집 수건에도 결이 있다는 건 놀라운 발견 중 하나였다. 그런 건 호텔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수건을 건조기에 돌릴 때마다 새것처럼 바스락하고 부드러운 면의 촉감이 살아났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먼지가 옷에 달라붙어 있었던 건지. 시커먼 먼지가 가득 찬 건조기 필터를 보자면, 그동안 이 먼지들을 그대로 단 채 입고 다녔겠구나 싶어 마음이 이상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건조기를 돌리게 됐다. 그저 세탁이 끝난 옷을 건조기에 넣으면 끝이었으니까.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든 할 수 있어 좋았다. 매일 뽀송하게 건조된 옷을 개는 일이 내겐 가벼운 정화 의식이었다. 리추얼이 뭐 별건가. 잔열이 느껴지는 옷을 탁탁, 하고 편 뒤 단정하게 접노라면, 어지럽게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괜스레 여러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는 날에도 건조기에 이불을 넣고 돌렸다. 이불에 붙어 있던 우울하고 습한 기운이 떨어져 나가고, 가볍고 산뜻한 기운만 남았다. 그러고 나면 이불이 주는 기운에 푹 쌓여 안심한 채 잠들 수 있었다.


건조기 어때? 좋아? 나 혼수로 살까 해서. 건조기를 산다 했을 때 제일 크게 나무랐던 지인이 내게 물었다.


응, 좋아. 뭐가? 옷이 뽀송뽀송해졌어. 언제든 그렇게 입을 수 있게 됐어. 삼 일에 한 번 옷을 돌려 입었거든. 두 번째 날이면 킁킁 냄새 맡고 김칫국물 따위가 묻지 않았는지 형광등에 옷을 요리조리 비춰보던 날들은 이제 안녕이야. 쿰쿰한 냄새가 나던 수건도, 언젠가는 마주할 것만 같았던 내 옆구리의 아가미도 이젠 영원히.


이야기하면 할수록 신이 났다. 정말로, 정말로 좋았다.




발행일. 2022.05.07 | 글감. 나에게 넌 준비된 선물 같아


보래 (소원)

취미는 임시보호, 특기는 입양. 지금은 심장병과 신부전을 앓는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남은 생을 뚝 떼어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같은 날 눈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4년 째 유애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며 고양이를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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