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27
우리는 카페에 있다가 나왔다. 마주 앉아 표정을 보는 게 힘들었다. 언쟁을 풀기에는 걷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여자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역시도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옆모습은 무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말을 꺼냈다. 아까 말해주었던 나에 대한 불만이 있던 행동들에 대해 나는 이유를 전달했다. 그녀는 내가 했던 모든 이유들을 납득하지 못했다. 역으로 하나씩 반박하였다.
논리적인 반박들은 납득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는 날카롭게도 내가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진심을 건드리는 분석을 내놓았다. 나는 꼼짝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여러 가지를 말했다. 몇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납득할 수 없는, 들으면 오히려 화가 나는 말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을 때,
"그건 말야. 너가 날 덜 사랑하기 때문이야"
이 말만큼 무책임한 말이 있을까? 지금까지 논리로 포장했던 여자친구의 말은 이 한마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자신 있게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했다. 사랑을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납득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도 웃겼지만, 사랑한다는 나의 주장을 여자친구는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다는 말로 잘랐다. 증거가 없이 심증만 있는 진실을 납득시키긴 어려웠다. 나는 슬프게도 논리 있게 대항할 방법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여자친구의 마음은 나도 알 틈이 없이 닫혀있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배려들이 상대방의 인지로는 사랑하지 않으니 나올 수 있는 행동들, 사랑하지 않는 무책임으로 오독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니 힘이 빠졌다. 나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마음의 문제, 닫힌 생각. 이미 나는 나도 모르게 끝나있었다. 스스로 결론 내버리고 미래도 결정지은 채 통보받았다. 카페에 앉아있었을 때 함께 만든 커플링을 뺐다 꼈다 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직감으로 알게 되었다. 이미 마음은 결정되었다는 것을. 며칠 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이제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이제 관계에서 오는 고민은 나의 정신적 에너지를 갉아먹는 일이었다. 내가 연애를, 결혼을 하고 싶은 일은 정서적으로 서로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함이 컸다. 이 세상 그래도 너는 내 편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편이다.라는 베이스로 인생을 살면 그 사실만으로도 의지가 되었으니까. 싸우면서, 우리는 사랑하니까 싸우는 거야.라고 하면 그건 정말 사랑일까? 반대로 생각하면 싸움만이 서로를 더 알 수 있게 해주는 걸까?
나는 이제 낯섦이 싫다.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좋은 나에게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건 너무 어렵다.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하루 루틴이 어떤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그것을 알기에는 나는 이제 지쳤고, 덮어쓰기를 많이 해서 손상된 데이터처럼 글러 먹었다.
서로에게 맞춰야 하는 스트레스와 정서적 안정, 외로움과 혼자 있다는 자유로움. 나는 언젠가 이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미 이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하는 마지노선을 넘은 건 아니지만, 결정하기에는 조금 늦었다. 상황과 나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