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33
20대 중반이었을까? 교수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휴학을 결심했다. 나의 목표는 여행이었다. 여행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러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집 근처에 있는 맥주집을 선택했다. 가까웠고, 시급도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술집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경험해 보는 술집 아르바이트는 쉽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도 앉아서 쉴 수 없었고, 맥주를 능숙하게 따르고, 무거운 잔을 여럿 들 수 있어야 했다. 술집에는 진상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일했던 곳은 오피스 지역이라 비교적 진상을 덜 만났다. 일이 끝난 후, 맥주관을 청소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등, 뒷정리도 꽤 힘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어려웠다.
술집 사장님은 야망이 커서 국산 맥주와 더불어 다양한 수입 맥주와 위스키, 와인도 함께 팔기 시작했다. 이전 위스키 사업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위스키는 나름 문제가 없는 듯했으나 와인은 생소한 분야였던 모양이다. 새롭게 와인을 담당할 매니저와 직원을 새로 고용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업무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더 친해져야 하는 건 어려웠다. 새로 온 직원과도 일을 할 때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사적으로 말을 섞는 건 거의 없었다. 관계가 개선될 수 있었던 건, 이 친구가 먼저 다가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말을 했고 나는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친구는, 내가 그 술집에서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이후,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렸고, 그 위는 나이에 맞춘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웠다. 동갑이어서 우리는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좋아해서 우리는 자주 술을 마셨다. 근처 술집은 물론이고 때때로 멀리 나가서 마시기도 했다. 일은 12시 혹은 1시에 끝났으니 그 이후에 양꼬치를 먹거나 노량진을 가기도 했다.
사소한 건 개의치 않아 하는 털털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고 주관이 뚜렷한 그 친구가 점점 마음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친구에 옆에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내가 그 친구가 고마웠던 건 나로 하여금 언젠가 그 친구와 깊은 관계로 변할 타이밍이 있을 수 있겠지 라는 생각에,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던 점이었다. 그 친구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졸업도 하지 않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 격차는 내게 너무나 컸다.
열심히 돈을 벌어 떠났던 여행이 끝난 후, 나는 대학교로 다시 돌아갔고, 그 친구도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 이후로도 우리는 가끔씩 연락하며, 술을 마시곤 했다. 시간이 지남에 비례하여 연락은 뜸해졌지만, 정말 뜸해졌지만, 그래도 가끔은 연락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뻤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힘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는 그 친구에 틈에 들어갈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이제는 놓쳤다. 아마 어렴풋이 내가 생각했던 마음을 눈치챘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그런 감정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때처럼 좋아한다기 보다, 그 시절의 아련함과 돈을 벌기 위해서 힘썼던 맥줏집 안에서의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다. 우리가 함께 일을 한 건 고작 반년정도였다. 나는 여행을 시작할 기간까지 돈을 벌어야 했고, 이 친구는 먼저 그만두었다. 이제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건 그 시절의 기억뿐이지만, 여전히 가끔 연락이 이어지는 것만으로 도 기쁘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건 평생 혼자 가져가야 할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 감정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리고 연인이 있다면 그 연인에게도. 특히 연인에게는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과거에 사는 사람이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현재는 암울하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찬란한 것처럼 느껴졌던 과거뿐. 왜 나는 지나도 괜찮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정말로 지나버리면 후회할까. 과거는 무적이다. 시간은 과거를 계속 연마해서 더 밝게 만들어버린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게 현재는 큰 의미가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미 현재와 미래에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아직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던 과거가 내게는 더 찬란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