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일요일) 오후 교회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서촌에 들렀다. 가로수 단풍이 황홀해 놓칠 수 없었다. 공휴일에 길거리 단풍을 지나치는 무신경은 가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내와 나는 자동차를 멀리 주차해 놓고 일부러 버스를 타고 와서 서촌 경복궁 담장 길을 걸었다. 노란 은행나무잎이 초록 잎과 대비되어 더 화려하게 찰랑거렸다. 젊은이들이 핸드폰 카메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웃는 모습이 참 즐거웠다. 젊음이 거리를 뒤덮었다. 우리도 그 속에 살짝 끼어들었다.
아무도 바쁘게 걷지 않았다. 앉아 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풍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 우리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걸었다. 일부러 아주 천천히 걸으며 작은 가게들과 좁은 주택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붕어빵도 사 먹었다. 마침 그곳에 노벨 문학상을 탄 한강씨가 운영했다는 <책방, 오늘>을 발견하고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지금은 유명세 탓인지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골목길 구석구석에 아기자기하고 예쁜 카페들과 레스토랑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카페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테이블마다 음료수와 음식을 먹으며 재잘거리는 젊은이들 덕분에 그들의 아버지 세대인 내가 흥겨워졌다.
카페 '라' 2층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박노해 사진전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울림이 있는 문구가 있었다.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계획이 아니다. 확고한 삶의 원칙이다. 나머지는 다 믿고 맡겨두기로 하자. 계획의 틈 사이로 여정의 놀라움과 인연의 신비가 찾아오리니."
나는 노동운동가에서 영성가로 성숙한 박노해를 새롭게 발견했다.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오던 그가 삶에 브레이크를 밟고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는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세 시간 동안 서촌 거리와 골목길을 소요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며 주일 밤을 느긋하게 보냈다.
나는 느릿느릿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느린 시간이 나에겐 생명처럼 소중하다. 일상은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으로 충만하다. 몸이 바쁘게 움직이면 영혼이 저 뒤처져 몸을 따라오지 못한다. 바쁘게 살면 시간이 화살처럼 흐른다. 나의 주체적 자아가 희미해지는 시간이다.
바쁜 시간에는 내 자아가 분리되고, 느린 시간에는 내 자아가 통합된다. 바쁘게 살다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 그리워한다. 쉬는 시간에 그것이 나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바쁘게 일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행복하게 살려면 느린 시간이 필요하다.
노르웨이의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은 느린 시간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느림이 없으면 삶은 숨이 막히고,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도 구분할 수 없이 급히 꿰매진 조각이 되고 만다." <삶의 의미, 191쪽>
에릭센은 나무를 빗대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느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무는 뿌리에서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나는 나무는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생존에 필요한 휴식을 취하며 위쪽만큼이나 아래쪽으로도 자란다." <삶의 의미, 191쪽>
현대인들은 열심히 일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신화를 곧장 믿는다. 그러나 자주 쉬고 느리게 걷고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은 창의성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다. 창의성이 높아지면 혁신의 기회가 늘어나고, 혁신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바쁘게만 살면 눈앞의 현실밖에 보이지 않는다.
느린 시간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노동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머리를 비우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는 아름다움을 선물해 준다. 느린 시간은 향기롭다.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 하나 집어 들고 경이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다면 삶은 이미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