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지인에게 비젯 티 접란이라는 백합과 식물을 분양을 받았다. 요즘 식 집사라 칭하며 집에서 식물도 많이 키우는데 나는 그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야무지지는 못하다.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을 받아 왔으니 생명연장은 시켜줘야 하지 않나 죽어나가는 건 상상하기 싫어진다. 비닐에 잘 넣어 온 식물은 벌써 잎이 말라서 퍼석퍼석하다. 화분에 심기 전 식물이 안정적으로 자라기 위해서 물꽃 이를 해주어야 한다. 뿌리를 충분하게 내리게 도와주는 것이다. 입구가 넓은 투명 유리볼이 필요하다. 예전에 사두었던 기억이 있어서 여기저기 찾아본다.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한쪽에 모아둔 1.5리터 페트병뿐! 순간 망설이지 않고 페트병을 집어 든다. 그리고 페트병을 눕힌다. 망설이지 않고 페트병의 등부분을 칼로 넓게 잘라서 마치 배처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물을 채워 비젯 티 접란을 하나씩 담가준다. 비젯 티 접란이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잎을 한번 만져주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페트병은 아마도 당분간 멋진 물꽃이 화분으로 변신해 있을 것이다. 화분을 만들면서 어질러진 곳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김치를 담아놓았으니 가져가라 신다. 기쁜 마음으로 차에 시동을 건다.
어머님의 식탁 위에는 작은 김치통이 올려져 있었다. 김치통 안에는 무와 빨간 고추, 파, 생강의 환상적인 비주얼이 돋보인다. 코끝에서 전해지는 톡 쏘는 향이 일품인 어머님표 동치미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다. 그 옆으로는 00 농장이라고 쓰여있는 재활용 플라스틱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 밥도둑 짠지, 남편과 아들이 순삭 하는 반찬이다. 그리고 달달한 사탕이 들어있었을 것 같은 핑크색의 예쁜 뚜껑의 유리병이 있다. 핑크색 병투껑을 시기라도 하는 듯 유리병은 온통 빨간 낙지젓갈로 채워져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우리 어머님은 이렇게 언제나 한번 쓰고 버려질 수 있는 쓸모를 다한 재활용품을 깨끗이 씻어 수납장 한쪽에 모아 두고 자식들에게 선물같이 종종 반찬을 만들어 주신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에 그림책 ‘레미 할머니의 서랍’의 사랑스러운 레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에는 쿠키를 담았던 깡통, 사탕이 담겨있던 빈병, 꽃다발을 묶었던 리본, 빈상자, 자투리 천, 빨간 털실뭉치 등을 넣어두신다. 봄이 끝날 무렵 딸기잼을 만들어 사탕이 담겨있던 빈병에 가득 담고 여름이 되면 설탕병은 피클병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물건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고 보관해두는 모습, 그리고 하찮아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 어머님의 모습과 겹쳐진다. 어머님은 30년 전에 입던 원피스도 반팔로 줄여 계속 입으신다. 당신은 옷을 기본적으로 20년은 입으신다며 덧붙이신다. 40이 넘은 남편이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연필꽂이도 작은방 책장에 두고 사용 중이시다. 몇 년 전 생신 때 드린 카드는 화장대 한쪽에 올해도 자리하고 있다. 그림책에서도 레미 할머니의 딸이 보내준 초콜릿 상자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모습이 나온다. 할머니의 초콜릿 상자에서 어머님의 화장대에 자리하고 있는 생신 카드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묻어져 나오는 것만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책 속에 빈병, 빈상자, 털실, 리본끝등이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며 들썩들썩한다.
서랍에서 나와 원래 용도와 다르게 새롭게 태어나 전혀 다른 꼭 필요한 용도로 쓰임새가 되는 것에 설레어한다. 오전에 비젯 티 접란을 담가 둔 페트병도 내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에 설레어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생각해 보면 나도 레미 할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다. 맛있게 먹은 쿠키가 들어있던 원형 철제 통 속에는 비즈를 모아두었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포장했던 리본은 꽃잎 방향제를 담아둔 컵을 예쁘게 장식해 주었다. 버려지니 않고 재탄생시킨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나 스스로도 뿌듯해진다.
무엇이든 손에 쉽게 넣을 수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쉽게 버려지기도 하는 게 아쉽다
레미 할머니와 우리 어머님처럼 작은 물건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도록 노력히며 살아갔으면 한다
레미할머니의 서랍 /사이토린•우키마루 글/구라하시레이 그림/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