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에스프레소의 길이다. 코로나 락다운 기간 동안 한창 인터넷 쇼핑에 빠져있을 때 커피 머신을 살까 말까 한참 마음이 살랑였었다. 드라마에선 크리미한 크레마가 일렁이는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 있는 여배우들이 얼른 하나 주문해 충동구매를 불러일으켰지만 ppl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아 메었다. 간신히 지름신을 왔던 길로 다시 보낼 수 있었던 건 올라간 콜레스테롤 치수와 복잡한 부엌에 더 이상의 살림살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서였다. 콜레스테롤 치수를 내려보겠다고 필터에 거른 닝닝한 드립 커피를 몇 년을 마셨다. 가끔씩 풀어져보자 싶을 땐 모카 팟에 진하고 뜨거운 커피를 내려 마셨다. 맛있다는 커피빈은 다 섭렵해 보고 유튜브에 올라온 온갖 드립법을 섭렵해 가며 이 맛인가 저 맛인가 몇 년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다 얼마 전 더 이상의 머신을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이 무너져 내린 건 지난여름 유럽을 다녀와서다. 파리 오르세이유 박물관 카페에서 아들과 둘이 앉아 마셨던 카푸치노의 맛을 잊을 수 있을까. 아침이 나온던 플로렌스 호텔에서 필리핀 아줌마가 내려주던 커피는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 염치도 없이 남편과 함께 매일 아침 한잔만 더 부탁했었다. 아침 일찍 카페 윈도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씩을 선채로 후딱 마시고 가던 밀란 사람들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남편과 나는 유럽 여행을 하고 와서 커피 앓이를 했다. 원래도 닝닝했던 드립 커피는 더 맛이 없어졌고 모카팟으로 내린 커피는 에스프레소의 깊은 맛과는 또 달랐다. 한동안 로컬에 인기 있는 필즈 커피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거기도 이젠 안 가게 됐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기로 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그 브랜드에 대신 작은 사이즈를 사기로 하고 온갖 온라인 커피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공부했다. 에스프레소의 세계는 개미지옥과 같아 파면 팔수록 끝없는 전문가의 조언들이 넘쳐난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알아듣기도 힘든 전문 용어들이 즐비하다.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빠져드는 것처럼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 조사하고 준비했다. 우선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머신을 사고 각종 액세서리들을 따로 주문했다. 그리고 처음 뽑은 한 잔. 아 이 맛이야 예전 안성기가 커피 선전 할 때 나온 문구는 선전용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마시던 그 비주얼은 아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만족스러운 깊은 맛. 그리고 이어진 수없이 많은 실패한 잔들... 그라인드 사이즈가 문젠가 더 곱게 갈아보고 굵게 갈아보고 양 조절이 문제구나 바로 커피 스케일 주문에 들어간다. 생물 실험 시간에도 이렇게 정확하게 무언가를 재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커피 한 알 두 알을 넣었다 뺏다 하며 정확한 무게를 재고 이번엔 제대로 나와라 고심한 사이즈로 그라인딩을 한다. 필터 베스킷으로 옮겨 요즘 커피 좀 내려본다는 사람들은 다 쓴다는 WDT 툴로 한참을 휘젓다가 이 정도면 충분한가 항상 애매한 세기로 템핑을 한 다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출 버튼을 누른다. 이 정도 지나면 골든 컬러의 커피 줄기가 대차게 나와 줘야 되는데 찔끔 거리며 나오기도 하고 사방팔방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또다시 인터넷을 뒤져보고 유튜브로 배워보고 종횡무진 엉망진창 일주일째.
마음 같아선 스타벅스에 잠시 일하러 가서 하루에 수십 잔을 뽑으며 실력을 갈고닦고 싶다. 미리 한 공부 덕에 머신을 샀다고 구름 같은 크레마가 일렁이는 커피가 짠하고 나오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뭐가 이리도 힘들고 어렵단 말인가. 전문가를 초빙해 배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래도 요즘 매일 아침이 오면 설레며 일어날 수 있는 건 또다시 실험하는 정신으로 새로운 에스프레소를 뽑을 수 있어서이다. 오늘은 제대로 나올까 적당한 양과 알맞은 그라인딩 사이즈 나무랄 데 없는 템핑 그 어딘가에 있을 완벽한 조합을 찾아 또 오늘도 장인의 마음으로 에스프레소를 뽑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