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며 묻는이들에게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게 대단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내 삶속에 우울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고 뿌리깊게 자리잡은 것 같다. '왜 우울해?'라며 내 자신에게 물었다. 바로 쉽게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 순간 '나의 우울함이 한 가지 이유로 정의되지 않는 것 처럼, 그 우울함을 깰 수 있는 방법또한 한 가지로 해결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다.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뭐가됐든 '활동'이라는 걸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하셨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병상에서 간호를 했고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다. 주요 활동이 대부분 정지된 것이다. 걱정이 참 많았다. 다행이지만 수술은 잘 됐고 아버지도 빠르게 회복하셨다. 아버지는 괜찮아지셨지만 나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일 수도 있고, 주변에 의지할만한 친구들이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심리상담 횟수도 이전보다 줄였고 스트레스를 해소 할 수 있는 곳도 많지않았다. 어느 날 공책에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적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봐도 뚜렷하게 표현되지가 않았다.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는지 난소에는 5~6cm의 혹이 두 개나 생기고 말았다. 담당의사는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냐"라고 직접적으로 묻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독'이라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익숙해지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내게 '고독'은 일종의 '자유'같았다. 자유롭게 살아가더라도 막상 그 자유를 느끼고 체감하는 일은 또 다르다. 극강의 스트레스를 받은 뒤 어느순간 이 혼자있음을 즐기게 됐으면서 새삼스럽게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고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정신적 에너지를 쓰는 일과 물리적 에너지를 쓰는일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한 가지 목표에 빠졌고, 그에 수반되는 모든 행동들은 수단으로 삼아 살아갔다. 그렇게 하니까 살아갈 수는 있었다. 버틸 수는 있었다. 비교적 좋게 마음편하게 산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우울했던 이유는 복합적였다. 한 가지 이유로 설명되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풀어가보려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절대로 우울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비교적 덜 우울해질 수는 있으니까. 이전에는 감흥이 없던 것들에게서 기회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일상'이다. 그동안 흘려보냈던 평범한 일상에 모든 답이 있었다. 결국 꾸준함은 최선의 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일상'안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회피하더라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혼자'인 순간이 오게되기 마련이다. 당장 외롭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일이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는 할 수 없지만, 그걸 빨리 깨닫느냐 나중에 깨닫느냐의 차이는 꽤 클 것이다. 지금부터 자존할 수 있는 연습을 하다보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고독'과 '자유'를 찬미하면서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