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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퓰러 Mar 10. 2024

난생처음 119에 신고해 봤다

소매치기 때문에 112에 신고한 적은 있어도 119에 신고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늘 난생처음 119에 신고를 해 봤다.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다 겨우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TV를 켜고 어젯밤 모두 보지 못한 <전지적 참견 시점>에 등장하는 전현무 무리들의 여행기를 보며 싱가포르 관광청 협찬받아 여행을 즐기는 전현무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작년에 싱가포르 갔다 왔는데.

출장이긴 했지만 난 뭘 했더라 비교하면서.


그러다 창밖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대각선 건너편 아파트에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파트 아래에서는 경비원 아저씨를 포함한 3~4명의 사람들이 불이 난 곳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나도 거의 최초의 목격자나 다름없는 것 같았는데, 그들이 신고를 했겠거니 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무기력하게 불이 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은 점점 커지고 까만 연기는 더욱 자욱하게 느껴졌다.

아직 구급차는 안 왔다.

설마 아직도 119에 연락이 안 된 건 아니겠지.

나도 급히 119를 눌렀다.

문자로 신고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사고 위치와 함께 사진도 함께 보내서 신고를 했다.

그 사이 까만 연기 뒤편으로 빨간 불이 보였다.

소방차는 아직도인가.

약 5분 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불이 난 아파트 건물 사람들 몇몇은 1층으로 피신을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집에 있는 듯했다.

피신한 사람은 10명 남짓이었다.

불이 난 옆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창을 열어 빼꼼 쳐다보는 사람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도착한 소방차는 여유가 있었다.   

저래도 될까 싶을 만큼 아주 천천히 차를 댔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불이 난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향해 물대포를 쐈다.

그 위치는 아주 정확했다.

까만 연기는 하얀 연기가 되면서 20층 높이의 아파트 전체를 삼켰다.

그러더니 불은 완전히 꺼졌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 버리는 것.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오늘 보니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사고는 예고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운이라는 것도 순식간이다.

작년에 쌍무지개가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며 행운의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아파트가 지금은 잿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사고가 난 아파트 동에서는 대피 방송과 같은 것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만다.

혹시 알았더라도 그것이 멀리 있다고 느껴지면 안이하게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힘차게 시작하려 했으나 열정과는 달리 나른하게 시작했던 요일.

화재의 현장을 보며 나른함이 무력감으로 바뀐 하루가 됐다.






초3 조카도 엄마와 교회를 가다가 소방차가 가득 들어선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고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방차가 불 끄는 걸 직접 본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말하자 조카도 응수한다.

"욤이도. 소방차가 불 끄는 것 직접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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