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상생의 언어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는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바다의 숨결을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랫길을 걷다 보면, 드디어 풀등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그 규모에 잠시 압도되어 발길을 멈춘다. 저 멀리 썰물로 드러난 풀등 끝자락에는 이미 앞서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 멀리 가서, 이제는 작디작은 점으로 보일 뿐이다.
흰 포말이 밀려와 흩어지는 농여해변의 모랫길 위로 잔뜩 낀 구름과 풀등이 맞닿아 있다. 바다와 하늘, 풀등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 끝없는 풍경 속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곧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듯 신비롭다. 누구나 두 팔을 벌려 풀등과 호흡하며 이 광활한 자연 속에 몸을 맡긴다.
풀등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지형이다. 평소에는 물아래 숨겨져 있다가 썰물 때 육지처럼 드러나는 모래톱으로, 바다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조수 간만의 차로 물이 빠르게 차오르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풀등은 바다와 밀물과 썰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이를 통해 자연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풀등의 물결이 들어오고 나가는 주기 속에서 생명들은 서로를 품고 살아가며, 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광활한 바다와 하늘, 구름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상생의 언어를 만들어간다. 이 자연의 리듬을 느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되새긴다.
풀등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발길을 멈추고 함께 한 장의 추억을 남긴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리고,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 속에 남을 한 조각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해변을 향해 발걸음을 되돌린다.
농여해변에 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다. 풀등 좌우로 차오르는 바닷물이 해안을 감싸며, 이곳이 얼마나 역동적인 생명력을 품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현지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물이 천천히 들어오는 것처럼 보여도 차오르기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밀려와 위험할 수 있어 물때를 놓치는 일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서해의 갯벌에서는 물때를 놓치는 일이 자주 사고로 이어진다. 조개를 캐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물에 갇히는 일이 뉴스에서도 종종 보도되곤 한다.
우리가 지나온 풀등은 이제 점점 물에 잠기고 있다. 멀리 잠수함 사령탑처럼 우뚝 솟은 바위 앞으로 가늘게 이어지던 풀등이 흐릿하게 모습을 감춘다. 물이 들어온 풀등 안쪽의 잔잔한 바다 위로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푸른 하늘이 투영된다.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풍광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이 아름다움은 자연의 상생의 언어가 만들어낸 기적처럼 느껴진다. 풀등을 걷는 동안 우리는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 자연과 함께 발걸음을 맞추며, 풀등과 바다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 고유한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물때를 맞추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의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는 일임을 깨닫는다.
사진을 찍어보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모두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 풍경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자연이 연출하는 이 순간은 아마도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해변을, 풀등을 떠나는 한 명의 행객으로 남는다.
풀등에서 바라본 풍경은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 하늘, 그리고 그 경계에서 숨 쉬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서로를 품고, 상생하며, 조화를 이루는 이 바다의 모습처럼 우리의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스친다.
끊임없이 변하고 유동적인 자연의 모습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물때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물때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계산에 머물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리듬이 된다면 우리의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넘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풀등이다.
풀등을 걷던 그날의 기억은 바다처럼 아득하고도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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