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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 l ll Jan 26. 2023

어스름.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내가 내민 왼손을 뒤집어 천천히 글자들을 써 내려갔다. 그 움직임을 따라 작은 음영들이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렸고, 따스한 살결의 감촉이 금세 차가운 길자리를 내었다.


  ‘L'heure entre chien et loup


  아주 오래전에는 해가 지고 뜨는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단어로 불렀다고 한다. 저 멀리 희끗하게 형체를 띈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크게 소리 내어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과 반대로 침묵을 지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와 늑대와 시간, 이라는 서양식 표현이야.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간이라는 거지. 나는 힘겹게 내려앉은 눈꺼풀 안으로, 창가에 여린 빛줄기를 맞이했다. 그녀는 나의 시선과 물음 없이도 여전히 손끝에 힘을 주어 천천히 하나의 획을 이어 그었다.  


  언젠가, 늦가을에 싸라기눈이 눈덩이처럼 커져 보이던 날에,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간간이 찾아오는 그녀의 침묵에, 소리보다 촉감의 날을 세웠다. 나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망울진 빛방울들을 헤집었고, 그녀가 마주한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손 끝 소리의 음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천천히 손바닥 안으로, 깊은 수면 안으로 잠긴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해 읽었다.


  나는 어둠을 지나 내려오는 새벽 어스름이 좋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 아침인사를 건네는 그 따스함을 사랑했고, 그 감촉을 따라 불투명한 그녀의 윤곽을 손으로 마주하는 감각은 흑백으로 구분되지 않는 그녀의 살아있는 붉은 혈액이 내 손끝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짧은 영원 속에 갇혀, 점점 더 빛으로 얼룩져가는 그녀의 숨결 아래에서 다가오는 아침을 멀리했다. 나는 그렇게 반쯤 치켜뜬 눈으로, 그녀의 가슴속으로 더 깊이 얼굴을 파묻어 사라져 가는 빛을 어둠 속에서 찾아 헤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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