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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14. 2023

새로운 삶의 나날들

1.

  달력을 펼치고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이곳에 온 지 44일째 되었다. 서해바다 가까이에 있는 이 학교는 작고 따뜻하고 고요하다. 첩첩첩산중의 마을은 아니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불빛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깜깜해지고 거리에 인적도 드물어지며 어느 밤에는 먼 축사의 소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운동장에 새로 심은 가을 국화와 이제는 잎사귀가 다 졌지만 봄에는 흐드러지게 벚꽃이 핀다는 급식실 앞 나무와 그 자리에 오래 있었을 것 같은 벤치와 학교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 같은 돌계단을 벌써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학교 담장을 두른 장미꽃들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계절의 어디쯤에서 그 꽃들이 붉고 빨갛게 피어날 것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운동장에 내려앉은 푸른 안개와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마주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퇴근 무렵의 분홍빛 따스한 노을과 먹물 같은 밤하늘과 작고 귀여운 별을 벌써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출장을 갈 때 교장실 앞에 편지와 초코파이를 놔두고 가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실에서 혼자 튜바를 연주하고 있는 아이와 악기와 곡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의 노트에 '연아 파이팅'이라고 적어주기도 했다. 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는 시험이 끝나고 학교 근처 밀알분식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고 남자아이들과는 명륜진사갈비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는 아이가 창가 쪽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또 오랫동안 그 그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물의 표정과 몸짓마다 특별한 감정들이 있어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그림 속 캐릭터를 통해서 대신 표현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아이의 고유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근데 교장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 나누어도 돼요?" 나는 힘차게 "그럼, 당연히 그래도 되지."하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다음날 언제나 열려 있는 교장실 문에 얼굴만 살짝 내밀고서는 나를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교실로 다시 뛰어갔다. 그리고 다시 오지는 않았고 복도에서 나를 마주치면 자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아이와 그 그림들에 대해서 아이의 삶과 희망, 슬픔과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날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눈이 오기 전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은 내게 상추와 호박을 계속 가져다주셨고 청소 선생님은 찐 감자를 주시기도 했다. 나이 많으신 그 선생님들이 내게 정중하게 손을 모으시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셔서 나는 언제나 먼저 고개를 깊이 꺾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9월에 생일인 선생님들을 위해 교무실에 모여서 축하해 주는 자리도 있었다. 나는 손 편지를 쓰고 시집을 선물로 드렸다. 편지를 조용히 읽어드렸다. 어떤 선생님이 눈물 날 것 같다고 하셔서 덩달아 내 마음도 조금 뭉클해졌다.

  내게 15년 동안 함께 살았던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건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셨다. 노견이라고 말씀하시다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았던 어떤 대상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의 눈물이었다. 나는 공손해졌고 마음도 아팠다.

  나는 선생님들이 교장실에 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가르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긴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연약한 한 인간 존재이기도 하니까. 선생님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선생님들의 갈망과 슬픔, 보람과 좌절 곁에 언제나 있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부모 연수에 가보기도 했다. 어머님들이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실제 시험처럼 연습해보고 계셨다. 나는 한분 한분 과정을 오래 지켜보았다. 너무 떨리셨는지 손을 계속 떠셔서 커피잔이 심하게 흔들리는 어머님도 있었다. 어머님들 모두 잔뜩 긴장하셨고 불안해하셨고 위축되어 보이시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어머님들께 그렇게 말씀드렸다. 새롭고 낯선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위대한 마음 같다고. 익숙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자책과 후회와 원망 같은 것들을 감수해야 하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도 져야 하니까. 그래서 그동안 전혀 해보지 않은 일에 씩씩하게 도전하는 어머님들이 너무 위대해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매일 지금 어머님들이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느낄 거라고. 매일매일 새롭게 배워야 하는 공부들, 해결해야 할 관계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이상하고 불안한 감정들..... 오늘 어머님들이 느끼신 그 감정들을 잘 기억하시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어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엄마가 있잖아,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랬는데 너도 그럴 때 있어? 그리고 있잖아.' 이렇게.    


2.

  전 학교를 떠나오던 송별회 날, 나는 많은 편지를 받았다. 재학생들과 부모님들도 많이 와주셨지만 특별히 졸업생들의 얼굴을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기뻤고 애틋했다. 기수별로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지난 20년 동안 내게 남은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아이들이구나 생각했다. 아이들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

  나는 그 편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읽어보고 있다.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려고 애쓰기도 하고 아주 환하게 웃기도 한다. 서둘러 읽어버리지 않고 읽고 싶을 때 천천히 차분히 소리 내어 읽어가고 있다. 나의 과거는 나의 새로운 날들에 여전히 살아있다.


  오늘 나는 아이들이 준 편지 가운데 하나를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이 편지를 읽으면 나는 우리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 외로움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또 다른 외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 진다. 지금 내게 아름다운 것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TO 철원쌤


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79pg


철원쌤이 생각났어요. 제가 철원쌤을 보며 울었던 건 외로워 보이셔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은 그 외로움이 뭔지 모금은 이해돼요.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은 조금 외로워서 서글퍼요 ㅠㅠ(퇴임 축하드려요!)

                                                                     20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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