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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Dec 22. 2023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빛 가까이로

1.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쓰고 있었다. 아이는 왼팔로 종이를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색 마스크와 안경 너머 아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이 안 나요." 아이의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아서 나는 귀를 아이에게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아이는 점점 더 작게 말했다. "슬픈 것만 기억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의 검은색 패딩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짚어주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떠오르는 슬픔들을 그냥 적어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의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떠오르는 것들을 잘 붙잡아 종이 위에 옮겨 주는 시간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픔을 적어보라고 하기에는 아이의 슬픔이 너무 많고 너무 깊은 것 같아서.


  아이가 그 시간에 쓴 글을 나중에 읽을 수 있었다. 아이는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아빠가 맨날 오토바이 태워서 초등학교에 데려다준 거'라고 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고도 썼다. 엄마랑 아빠랑 자기 생일 때 밖에서 칼국수 먹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가족 다 같이 처음으로 먹은 날이자 마지막이라' 기억에 남는다고도 썼다.


2.

  며칠이 지나고 복도에서 아이와 마주쳤다. 나는 아이의 글을 읽었다고 말하며 네가 가진 복잡하고 모순적인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아무 미사여구 없이 사실적으로 써 주어서 글이 너무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좋은 글은 때로 아프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말하는 동안 아이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고. 내가 무슨 글을 잘 쓰냐고, 내 글이 무슨 좋은 글이냐고 말하듯이 아이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나는 웃으며 "글쓰기 선생님이 글이 좋다고 말하는데 너는 왜 자꾸 아니라고 해"라고 말했다.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싫고 갈수록 모든 게 부정적으로만 보인다고 썼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가녀리고 희미한 빛을 세상 밖으로 꺼내 간신히 보여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금방 사라질 것 같은 그 작고 작은 아이의 빛을 나는 내내 생각하고 있다.


3.

  서해 바다가 가까운 이 작은 학교의 벚꽃 나무는 꽃잎이 진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 꽃이 진 자리에는 이제 더없이 높고 광활한 푸른 하늘이 보인다. 텅 빈 나무는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나는 안다. 봄이 오면 또 하얀 벚꽃이 거짓말처럼 다시 피어나고 또 진다는 것을. 삶은 불확실하고 우리는 연약하며 고통은 계속되지만 언제나 우리는 상처와 희망을 동시에 품에 끌어안고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아주 가녀리고 작고 희미한 빛 가까이로.

  희망이 거기에 있고 사랑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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